남편 신채호와 의열단 지원···일제 탄압과 생활고 견디며 항일 독립운동 활동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박자혜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박자혜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박자혜(朴慈惠) 선생은 3·1운동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선생은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후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해 의열단 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했다. 독립운동가이면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어려운 생계와 일본의 탄압을 감내했다.

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린 시절 ‘아기 나인’으로 궁궐로 들어갔다. 선생은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일제의 궁내부소속 고용원 340명과 원역(員役) 326명 해직 조치에 따라 궁을 떠났다.

이후 선생은 숙명여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에 다녔다.

당시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교사와 의료인을 제외하고 직조업, 바느질 품, 마전장사, 유모, 양잠, 홍삼직공, 수놓는 직공, 굴 따는 여자, 기생, 쌀 고르기, 여고원, 연초직공, 광주리장사, 음식장사, 아이돌보기, 길삼, 수모 등이었다. 이러한 직업은 대우가 좋지 못했다.

당시 산파는 전문 의료인으로서 사회적 인식이 좋은 편이었다. 선생은 조산부양성소에서 간이 생리학, 간이 산파학, 해부학, 태상학, 간호, 육아, 소독법 등을 배운 후 조산부 자격증을 얻어 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 취업했다.

◇ 3·1만세운동 참여···간우회 조직

선생이 간호부로서 근무하고 있을 때 온 겨레는 독립을 위해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같은 해 3월 1일부터 서울에 있는 각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다. 총독부의원에서 일했던 박자혜 선생과 동료 간호원들, 의사들, 연구원은 환자들과 함께 나라 잃은 슬픔을 느꼈다. 선생도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 있다가 만세운동으로 부상당한 이들을 보면서 독립에 대한 염원을 느꼈다.

이에 선생은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했다. 선생은 의사 김형익과 함께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했다.

또 선생은 뜻을 같이한 간호사들과 3월 10일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경에 체포됐다. 이후 풀려난 선생은 더 이상 일본인들을 위해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병원을 그만뒀다.

이후 선생은 북경으로 망명해 1919년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한다.

◇ 의열단 활동 지원···나석주 거사 도움

박자혜 선생은 1920년 봄 북경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났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둘을 중매했다. 신채호와 당시 24살이었던 박자혜 선생은 이렇게 해서 북경 금시방가(錦什坊街)의 한 셋집을 얻어 가정을 꾸렸다.

1922년 박자혜 선생이 둘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신채호는 경제적 이유로 선생과 수범을 국내로 돌려보냈다.

국내로 돌아온 선생은 인사동에서 산파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신채호는 1923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참여했다. 박자혜 선생은 국내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신채호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선생은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탄 사건 때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석주를 돌보고 안내하는 등 의열단 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했다.

◇ 힘겨운 삶과 일제 탄압 감내

박자혜 선생은 가정경제, 자녀교육, 남편의 독립활동 내조 등을 감내해야 했다. 또 일경의 감시와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의 산파업이 잘 안 돼 선생 집 아궁이에 불 때는 날이 한 달 중 4, 5일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어려운 생활 중에도 선생은 아들 수범의 교육을 위해 교과서를 겨우 구입해 교동 보통학교에 보냈다. 아들도 거의 굶으며 학교를 다녔다. 이 같은 환경에서 선생은 아들 수범을 한성상업학교까지 졸업시켰다.

한 번은 대련감옥에 수감돼 있는 신채호 선생이 너무 추워 선생에게 솜을 많이 누빈 두툼한 옷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선생은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 이를 해주지 못했다.

당시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에게 “대련이야 오죽이나 춥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라며 눈물을 흘렸다.

선생은 아들과 함께 풀장사, 종로네거리에서 참외장사를 하기도 했다. 신채호 선생이 체포된 후 동아일보는 선생의 생활을 공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후 전국에서 선생 가족들을 위해 후원금을 보내왔다. ‘무명씨 1원, 10원, 강계 동인의원 김지영 10원, 이천군 박길환 5원, 정주군 이승훈 5원 등’이었다. 1929년 천도교부녀회에서 7원을 동정금으로 보냈다.

일제의 감시와 폭력에도 선생과 아들은 고통을 받았다. 큰 아들 수범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일경이 책가방을 뒤져 검색했다.

선생은 큰 아들 수범의 학비를 위해 신채호의 동지, 친지, 친척 등을 찾아 가기도 했다. 선생은 일경에게 갖은 욕과 폭력을 당했다. 수범은 일경의 간섭으로 선린상고를 중퇴했다.

박자혜 선생이 신채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7년이다. 선생 가족은 박숭병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그러나 신채호는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어 다시 선생과 수범을 국내로 보냈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선생은 외국위체위조사건으로 감옥에 간 신채호의 석방을 기다렸다. 그러나 1936년 2월 관동형무소에서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가 왔다. 선생은 바로 아들, 친구 서세충과 함께 여순으로 갔다. 그곳에서 남편 신채호 선생을 만났으나 의식이 없었다.

결국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박자혜 선생은 남편의 유해를 싣고 국내로 돌아왔다. 많은 지인들이 장례를 도왔다.

선생은 홀로 셋방에 살다가 194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정부는 1990년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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