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일제 탄압에도 만세운동 이어가···일제, 교회에 주민들 가두고 불 질러
일본 정부, 제암리 학살에 대해 여전히 공식적 사과·보상 안 해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23인의 묘소와 기념탑. / 사진=보훈처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23인의 묘소와 기념탑. / 사진=보훈처

홍원식(洪元植) 선생은 수원 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제압하기 위한 일제의 제암리 학살 만행으로 순국했다. 당시 부인 김씨도 같이 순국했다.

선생은 1877년 10월 13일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넘말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청년이 된 후 대한제국 서울 시위대 제1대대 군인으로 서소문 병영에서 일했다. 선생은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군대가 해산을 당하자 의병전쟁에 참여해 일제와 싸웠다.

선생은 1914년 3월 29일 고향 제암리로 돌아와 기독교 권사가 돼 학교를 세웠다. 선생은 제암리에서 제암 교회의 안종후와 천도교인 김성렬 등과 함께 나라를 구하겠다는 목적으로 ‘구국동지회’를 결성했다.

◇ 일제의 총칼에도 발안 장터 만세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식민지 하에서 일제의 강압적 무단통치가 심해지고 민족적 차별과 불평등이 커졌다. 우리 민중들은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한 3.1운동에 거족적으로 나섰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발표와 탑골 공원에서 시작한 3.1운동은 전국으로 퍼졌다.

당시 수원군의 3.1운동은 서울과 개성의 만세운동과 함께 3월 1일 수원면 방화수류정(용두각) 아래에서 시작했다. 송산면에서는 홍면옥과 홍효선 등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송산면 주민들은 3월 26일 오후 5시경 송산면사무소로 몰려가 태극기를 게양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민들은 사강리 장날인 같은해 3월 28일 홍면옥과 홍효선 등이 앞장서 지역 주민들과 장터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했다. 10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했다.

수원군의 만세운동은 3월 31일 향남면 발안장터로 이어졌다.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는 1000여명의 시위 군중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발안장터의 만세운동은 식민지 수혜를 등에 업고 경제력을 장악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했다. 발안 만세운동에서 일본인 학교와 주재소, 상가 등이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됐다. 이는 일제의 경제적 침투에 대해 우리 민중들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 경찰과 보병들은 만세운동을 진압하면서 무자비하게 총을 쐈다. 발안장터의 만세운동에서 수많은 사람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날 4월 1일, 2일 밤에도 주민들은 당제봉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산상 횃불시위를 했다.

◇ 주민들 힘 합해 수원 최대 만세운동 벌이다

발안장터의 만세운동 후 4월 3일 수원군 최대의 만세운동이 우정면과 장안면의 연합으로 일어났다.

우정·장안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백낙렬은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 팔탄면 고주리의 김흥렬과 함께 유학자 이정근과 사전 모의했다. 발안장터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제암리와 수촌리, 고주리 주민들은 4월 3일의 우정면과 장안면의 대규모 연합 만세운동에 함께했다. 이때 홍원식 선생은 제암리를 대표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이 지역의 3.1운동 주동자들은 사전에 각 동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으니 각 호마다 1명 이상씩 나오게 하자고 결정했다. 이들은 일본인 순사 처단과 주재소 및 두 개의 면사무소를 파괴할 조직을 만들었다. 군중들이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기로 했다.

사전 준비 끝에 우정·장안면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은 4월 1일 밤 7시에 수촌리 개죽산의 봉화를 신호로 일제히 시작했다. 4월 3일 오전 11시 장안면사무소에 200여명이 모여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군중들은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집기류를 불에 태웠다. 곧바로 군중들은 화수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 앞에서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순사를 처단했다.

보훈처는 “우정·장안면에서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뿌리 깊은 종교 조직과 향촌 조직의 연대에 있었다”며 “3.1운동에 2500명이라는 대규모의 인원이 참여한 것은 우정·장안면민뿐 아니라 발안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 향남면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등의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결과였다”고 밝혔다.

◇ 일제 3.1운동 탄압하려 ‘제암리 학살’ 만행

일제는 3월 31일 발안 시위 후 경기도 경무부 경시 나가타니(長谷部巖) 대위를 중심으로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파견했다. 4월 3일 우정·장안면의 대규모 연합 만세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은 심해졌다.

일제는 시위를 주도했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밤에 수촌리를 급습해 김교철, 차인범, 정순영, 이순모 등을 체포했다. 일제는 진압 과정에서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공격했다.

제암리의 이웃 마을 수촌리는 일제의 만행으로 전체 42채의 가옥 중 38채가 불탔다. 축소 보고됐을 것으로 예상되는 일본 헌병 측 자료를 봐도 제암리 사건 이전 4월 2일부터 14일까지 8개면 29개 마을에서 소실된 가옥이 348호, 사망자 46명, 부상자 26명, 검거인원 442명에 달했다.

조선에 머물러 있던 헌병사령관이 대신에게 보낸 보고에 따르면 ‘수원과 안성 지방의 시위 주동자 검거 중에 1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276호를 소각했는데, 이 중에는 검거반원이 보복심을 일으켜 방화한 것도 확인했다’고 했다. 일제의 보복 탄압이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발안장터의 만세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4월 15일 주민 400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이와 같은 만세운동의 원인을 향남면 제암리의 기독교도와 천도교도로 파악했다. 이윽고 세계적인 학살 만행인 ‘제암리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일제는 우정·장안면과 발안장터의 만세운동 시위로 이 지역이 내란과 같은 상태라는 이유로 주민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1919년 4월 15일 벌어진 방화, 학살 후 파괴된 제암리 교회의 모습. / 사진=보훈처
1919년 4월 15일 벌어진 방화, 학살 후 파괴된 제암리 교회의 모습. / 사진=보훈처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이 발안에 도착했다. 이들은 제암리 진압을 시작했다. 이들은 제암리 주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이고 제암리와 인근 마을의 주민 약 20여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홍원식 선생도 아무것도 모른 채 주민들과 함께 교회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아리타는 주민들을 교회 안에 가둬 놓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채 부하들에게 불을 지르고 집중 사격을 명령했다. 제암리 교회는 총성과 함께 불타올랐다.

일제의 만행으로 홍원식 선생과 주민 20여명이 죽었다. 일제의 만행 소식을 듣고 이날 현장에 달려 온 홍 선생의 부인 김씨도 일본군의 총격에 사망했다. 홍 선생 부부는 홀로된 자식을 남기고 재가 됐다.

일제는 불타는 교회에서 뛰쳐나온 이들에게 총을 쏴 죽였다. 현장으로 남편을 찾아온 부인들도 죽였다.

일제는 이어 제암리 마을의 가옥들에 불을 질렀다. 이웃 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 신자 6명을 나무에 묶어 총살했다. 일제는 발안 만세운동과 우정·장안면 만세운동의 핵심 인물인 고주리의 김흥렬과 그 일가족을 참혹하게 죽였다. 죽은 이들은 재가 됐고 산 이는 소리 높여 슬피 울었다.

정부에서는 홍원식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부인 김씨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제암리 희생자들의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현지의 순국기념탑에는 23명(안정옥(安政玉)·안종린(安鍾麟)·안종악(安鍾樂)·안종환(安鍾煥)·안종후(安鍾厚)·안경순(安慶淳)·안무순(安武淳)·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안유순(安有淳)·안종엽(安鍾燁)·안필순(安弼淳)·안명순(安明淳)·안관순(安官淳)·안상용(安相鎔)·조경칠(趙敬七)·홍순진(洪淳晋)·김정헌(金正憲)·김덕용(金德用)·강태성·동 부인 김씨·홍원식·동 부인 김씨)으로 돼 있다. 연구자에 따라서 24명, 또는 고주리의 학살자6명(김흥열(金興烈)·김성열(金聖烈)·김세열(金世烈)·김주업(金周業)·김주남(金周男)·김흥복(金興福))을 포함해 29명 등으로 다르게 보고 있다.

◇ 외신, 제암리 학살 사건 전 세계에 알려

제암리 학살 만행 사건 직후 현장을 방문한 외교관과 외신기자, 선교사들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외부로 알려지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제의 만행을 보도한 외신 기사. / 이미지=보훈처
일제의 만행을 보도한 외신 기사. / 사진=보훈처

커티스·테일러·언더우드 등은 4월 6일 일어난 수촌리 마을 방화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중 제암리 사건 현장을 처음 목격하고 이 만행을 서울에 알렸다.

이후 스코필드가 여러 차례 제암리를 방문해 부상자 치료와 난민 구호에 적극 나섰다. 4월 19일에는 영국 대리영사와 노블, 감리교 선교사들이 현장을 찾았다. 노블 등 감리교 선교사들은 제암리와 수촌리 등지를 자주 찾아 부상자를 치료하고 난민들을 도왔다. 감리교 선교부는 선교비 2000원을 긴급 지원해 교회와 교인 집 복구비로 사용하도록 했다.

선교사들은 현장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 교회에 진상을 알렸다. 이들은 외교 경로를 통해 총독부에 제암리 만행을 항의하며 구호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제암리 사건으로 국내 선교사들과 외국의 여론이 악화되자 일제는 제암리 사건의 원인이 된 수촌리와 화수리 토벌 작전을 수행했던 지휘관들을 문책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것은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보상, 역사적 과오에 뉘우침 있어야

제암리 사건은 민족해방운동인 3.1운동을 일제가 폭력으로 무자비하게 대응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동시에 제암리 사건은 일제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식민 지배에도 불구하고 홍원식 선생의 구국 운동 등 끊임없는 우리 민중의 저항과 의지를 보여줬다.

현재 제암리 학살이 벌어진 자리에는 발안장터의 만세 함성과 아픔을 간직하고,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제암교회는 1919년 4월 15일 일제의 만행으로 불탄 뒤 7월 자리를 옮겨 다시 건립됐다. 1938년 현재의 위치에 기와집 예배당이 만들어졌고 1959년 4월에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세워졌다.

1970년 9월 일본의 기독교인과 사회단체에서 속죄의 뜻을 담아 1000만엔을 보내 새 교회와 유족회관이 건립됐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서 공식적인 사과를 한 것은 아니었다.

1982년 9월 대대적인 유해 발굴 사업이 진행돼 23위의 묘로 안장됐고 다음해 7월 기념관과 새로운 기념탑이 세워졌다.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의미보다 우리 손으로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자는 뜻이 모여 구예배당과 기념관을 헐고 새롭게 제암리 3.1운동순국 기념관이 세워졌다. 기념관은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고 외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제암리 기념관 입구에서 오른쪽 작은 등선 위에는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23인의 묘소가 있다. 아무 말 없이 침묵하고 있는 듯하지만 묘소 주변에 핀 분홍빛 무궁화와 함께 아직도 소리 없는 외침이 존재하는 듯하다”며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보상, 그리고 더 중요한 역사적 과오에 대한 뉘우침이 이뤄지지 않는 한 이곳에서는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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