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수 추첨은 관련법상 전산관리지정기관 업무 아냐
은행을 회원사 형태로 보유한 금융결제원이 서비스 차원서 하던 것
업무 전체 넘겨받아 하게 돼 신뢰도 하락 우려도

이르면 내달부터 청약시스템 이관과 함께 정비사업장 동호수 추첨도 한국감정원에서 맡게 될 전망이다. / 그래픽=이다인 디자이너
이르면 내달부터 청약시스템 이관과 함께 정비사업장 동호수 추첨도 한국감정원에서 맡게 될 전망이다. / 그래픽=이다인 디자이너

 

청약시스템 이관으로 업무영역이 넓어진 한국감정원이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장 동 호수 추첨까지 해야하는 등 부담이 커져 울상을 짓고 있다. 주택업계는 기존 전산지정기관인 금융결제원 아파트투유가 추첨을 수행해온 만큼 감정원 역시 이 업무를 할 것으로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다. 사실 동 호수 추첨은 전산지정기관이 해야 할 업무가 아니다. 그동안 금융결제원이 자의대로 해 온 서비스로, 감정원은 주택법 개정과 함께 청약 관련 업무를 넘겨받으면서 업무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넘겨받는 형태가 됐다.

8일 국회의안정보시스템 및 관련업계에 따르면 청약 업무 이관에 관한 내용을 담은 주택법 개정안(함진규 자유한국당 의원 대표발의)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해당 법안은 입주자 저축 및 주택공급과 관련된 정보에 대한 전산관리업무 담당기관을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법안이 빠른 속도로 통과되면 내달부터 한국감정원은 청약업무 전부를 금융결제원으로부터 이관 받는다.

전산관리업무 담당기관의 업무는 주택청약과 관련한 업무에 국한돼 있다. 구체적으로 국토교통부 장관이 주택을 공급받으려는 수분양자에게 입주자 자격, 주택 소유여부, 재당첨 제한 여부, 공급순위 등을 공급신청 이전에 확인할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또 이를 위해 감정원은 입주자저축정보 등을 요구하고 이를 종합적으로 관리하도록 하는 정도다.

한국감정원 관계자는 “관련 법상 이관 업무로 우리가 해야 하는 업무는 아파트나 오피스텔 청약에 관련한 업무 등에 한정돼 있다. 정비사업장 동 호수 추첨은 해야 할 업무가 아니다”라며 “하긴 할 테지만 그 업무들은 대행을 해주는 것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유사 업무를 이관 받는 기관이 이전부터 해오던 업무이니 감정원도 하겠지만, 공신력을 갖는 것도 아니고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권리관계에도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감정원은 기존에 해 주던 업무 프로세스도 전해들은 바 없는데다가 인력 등 한계로 똑같이 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금융결제원은 지금까지 각 조합별 관리처분계획과 총회의결안 검토를 자체적으로 거친 뒤 순위에 맞게 동 호수 추첨을 돕고 있다.

금융결제원이 그동안 소관 업무가 아닌 정비사업장의 동 호수 추첨 업무까지 제공한 것은 금융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조직의 태생과 무관치 않다. 주택청약업무는 과거 주택은행 시절부터 있었는데 이후 2000년대 초반 주택은행이 국민은행과 통합되면서 청약업무를 국민은행이 취급했다. 이후 주택청약기금 수탁은행이 국민은행에서 여러 은행으로 확대되자 이 업무를 금융결제원이 전산관리업무 담당기관으로 지정되며 전적으로 맡게 됐다. 시중은행은 전국의 각 정비 사업장과 이주비 집단대출 등으로 엮여있다. 이들을 회원사 형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협회 형태의 금융결제원이 서비스로 추첨을 도와 준 것이다.

일부 재건축 조합에서는 동 호수 추첨 업무가 공공기관으로 넘어가면서 신뢰도가 상승할 것이란 기대감이 컸던 만큼 실망감도 드러내고 있다. 동 호수 추첨은 층과 향을 비롯해 집값까지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중차대한 일인 만큼 조합원에게 중요한 일인데, 앞으로 해당 업무를 담당할 감정원이 등 떠밀려 하는 잡무 수준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 정비사업장 관계자는 “감정원은 공공기관인 만큼 정보공개 청구 등으로 추첨방식을 보다 투명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되레 지금 진행을 돕는 금융결제원 보다도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서울 서초구 반포우성 재건축 조합(르엘 신반포 센트럴)은 신뢰도 문제로 결국 조합 내에서 탁구공에 동호수를 적어 직접 선택하는 뽑기 형식을 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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