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업체 노동자 ‘불법 파견’도 인정···기존 노동행정 판단·민사 판결 뒤집혀

삼성 서초사옥. / 사진=연합뉴스
삼성 서초사옥. / 사진=연합뉴스

삼성그룹이 미래전략실(미전실)을 사령탑으로 한 조직적인 노조 와해 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이 법원 판결을 통해 드러났다. 법원이 기존 노동행정 판단과 민사 판결을 뒤집고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불법 파견’ 관계에 있다고 판단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18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유영근 부장판사)는 전날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등 26명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하며 미래전략실-삼성전자-삼성전자서비스-협력업체로 이어지는 부당노동행위 공모관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삼성이 만든 문건 6000여건의 문건을 근거로 삼성그룹의 조직적인 노조와해 작업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관계에 따르면 미전실은 2011년 6월 복수노조 제도가 시행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노조가 설립될 경우 비상상황실을 설치하고 즉시 와해 전략을 구하고, 실패하더라도 지연 전략을 구사하며 고사화’시킨다는 노사전략을 마련했다. 80년 넘게 이어온 그룹의 비노조경영 방침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미전실은 이 노사전략이 반영된 체크리스트 등을 만들고 계열사에 배포한 후 ‘복수노조 대응태세 점검’을 매해 2회 실시했다. 계열사는 미전실의 복수노조 대응태세 점검에 대비해 노조 설립 상황에 대비한 비상 시나리오를 마련하기도 했다. 미전실은 또 이 비상 시나리오를 점검한 뒤 보완할 사항을 추가로 지시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전자 역시 그룹 방침에 따라 자회사인 삼성전자서비스에 ‘복수노조 대응태세 점검’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미전실에 보고했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상세한 비상 시나리오를 구축하고, 삼성전자서비스 노조가 설립되자 이 비상 시나리오를 그대로 시행했다는 게 1심 재판부 결론이다.

재판부는 삼성이 노조원들에게 노조 탈퇴를 종용하고, 노조원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준 혐의도 유죄로 판단했다. 미리 마련한 시나리오에 따라 협력업체에 대한 단체교섭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은 부분, 노조원들을 표적 감사하는 방법으로 노조 운영에 개입한 부분 또한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노조원들을 먼저 감사 대상으로 삼고, 표적감사 논란을 희석하기 위해 비노조원 1~2명을 추가했다’는 내용이 담긴 내부문건을 부당노동행위 의사에 대한 직접증거로 인정했다.

아울러 삼성은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해 협력업체 노조원들의 개인정보도 파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은 협력업체 대표들을 통해 노조원들의 성명, 사번, 연령, 경력, 작업분야, 출신학교, 결혼 유무·이혼 여부·이혼 사유 등 가족관계, 채무 등 재산상태, 성향평가 등 ‘개인정보’를 수집했다. 아울러 노조 가입 및 탈퇴 동기, 노조 내 직책, 파업참여 여부, 정신병력 등 ‘민감한 정보’까지 수집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그룹 노사전략 작성과 복수노조 대응태세 점검에 관여한 피고인들 모두 공모 및 기능적 행위지배 인정할 수 있다”며 “검찰의 압수·수색에서 발견된 미전실, 삼성전자 및 삼성전자서비스의 수많은 문건에 비춰 미전실과 CFO 등 고위 임원들에게까지 보고가 이루어진 사실도 인정된다”고 꼬집었다.

◇협력업체 직원 불법 파견도 인정…근로감독·민사소송 결과 등 뒤집혀

재판부는 나아가 삼성전자 제품을 수리하는 협력업체 기사들이 도급이 아닌 ‘파견’ 관계에 있다고 판단했다. 피고인들의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는 유죄가 선고됐다.

이는 2013년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 판단과 2017년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결과를 뒤집는 것이다.

재판부는 협력업체가 처리하는 서비스 물량 98%가 삼성전자서비스의 사업인 데다가, 위장도급 문제가 이슈가 되기 전까지 협력업체 수리기사들이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서 삼성전자서비스 로고가 붙은 근무복을 입고 근무한 점에 주목했다. 삼성전자서비스가 협력업체 수리기사들에게 직접적으로 지휘 및 명령을 행사한 것도 판단의 배경이 됐다.

또 협력업체 사장 70%가 삼성전자서비스 임직원 출신인 점, 사실상 협력업체가 삼성전자서비스의 하부 조직처럼 운영된 점, 협력업체 수리기사들은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제공한 전산시스템을 통해 수리 업무를 부여받고 사건 처리 결과도 이 전산시스템에 입력한 점 등도 고려됐다.

재판부는 “고용노동부의 1심 판단 이후 새로 발견된 증거들에 의하면 삼성전자서비스와 협력업체 수리기사는 근로자 파견 관계로 봐야한다. 이것은 저희의 새로운 판단이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번 판결이 노동자들의 지위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삼성은 지난 1월 협력업체 노동자 7800여명을 직고용했다.

◇“노조 보는 시각, 사회 기대에 못 미쳐”…삼성전자·삼성물산 공동 사과문

삼성은 노조와해 관련 법원 선고가 나온 지 하루 만에 공식으로 사과했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은 18일 공동으로 낸 입장문에서 “노사 문제로 인해 많은 분께 걱정과 실망을 끼쳐 드려 대단히 죄송하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과거 회사 내에서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이 국민의 눈높이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앞으로는 임직원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이고 건강한 노사문화를 정립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