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가동···완성도 높이고 비용·개발시간 대폭 단축
가상공간서 20명 동시에 디자인 검증 가능···차량 개발 과정에 VR·AR 도입

현대차그룹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사진=현대차그룹
현대차그룹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 사진=현대차그룹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시대는 지났다.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는 시대다.”

현대자동차그룹 바디부문 담당 양희원 전무는 기자들 앞에서 이 같이 강조했다. 현대차그룹이 최상위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에 비해 비록 몸집이 작을지라도, 발 빠르게 움직여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는 완성차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포부에 대한 일종의 은유였다.

양 전무가 강조한 바와 같이 빠른 변화를 예고한 현대차그룹이 자동차 개발 과정을 혁신할 수 있는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도입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17일 경기 화성시 현대·기아차 남양기술연구소에서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중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을 활용한 디자인 품평장과 설계 검증 시스템을 미디어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버추얼 개발이란 다양한 디지털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상의 자동차 모델, 주행환경 등을 구축해 실제 부품을 시험·조립해가며 자동차 개발과정을 상당 부분 대체하는 것을 일컫는다. 디자이너가 원하는 대로 빠르게 디자인을 바꿔 품평까지 진행할 수 있고, 실물 제작 시 검증하기 힘든 오류 등을 빠르게 확인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고 업체 측은 소개했다.

앞서 현대차그룹은 지난 3월 150억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규모의 최첨단 디자인 품평장을 완공했다. 품평장 내에는 36개 모션캡처가 설치됐다. 이를 통해 평가자들은 VR 장비를 갖춘 채 가상의 환경 속에서 정확하게 디자인을 평가할 수 있다. 간단한 조작을 통해 차량의 부품 및 품질·재질·컬러 등의 조합이 가능하며, 고객의 눈높이에서 최적의 모델을 도출할 수 있다.

품평장에서는 20명이 동시 평가가 가능하다. 기자가 직접 해당 VR장비를 착용하고 평가자로 분(扮)해 가상 품평장에 입장했다. 1mm 단위로 정밀하게 감지된다는 모션캡처 기능이 다른 평가자들의 위치를 시시각각 화면에 나타냈다. 가상화면 속 평가자들은 상반신만이 표기됐다. 업체 관계자는 “실제 품평회의가 이뤄질 경우 상반신에 평가자의 사진과 직책 등이 함께 표기돼 가상의 공간 속에서도 곁에 있는 이의 식별이 가능하다”고 소개했다.

가상 품평장으로 지난 10월 공개된 수소전용 대형트럭 콘셉트카 ‘넵튠’이 들어섰다. 넵튠은 최종 디자인 평가부터 이 같은 VR 품평장이 시범 적용된 모델로 알려진다. 파리 등 VR을 통해 구현된 실제 도시부터 산·들·사막·눈 등 자연환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 위에 올라 선 넵튠이 한 눈에 들어왔다. 대낮의 모습뿐 아니라 헤드·테일 라이트가 켜진 한 밤중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외관뿐 아니라 내부인테리어와 장착된 기기 등이 눈앞에서 작동했다.

 

VR장비를 착용하고 가상의 디지털 차량에 탑승한 모습. /사진=김도현 기자
VR장비를 착용하고 가상의 디지털 차량에 탑승한 모습. / 사진=김도현 기자

현대자동차그룹은 향후 △유럽디자인센터 △미국디자인센터 △중국디자인센터 △인도디자인센터 등과 협업해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가상공간에서 차량을 디자인하고, 평가에 참여하는 원격 VR디자인 평가 시스템도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가상의 모델을 투영시켜 평가하는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 기술도 도입해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더욱 강화할 방침이다.

이날 품평회뿐 아니라 설계 품질 단계에 적용된 VR기술도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6월 VR을 활용한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을 구축한 바 있다. 축적된 3차원 설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디지털 차량을 VR에 구현하고, 이곳에서 차량의 안전성·품질·조작성에 이르는 전반적인 설계 품질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기존에도 디지털 차량 평가는 일부 진행됐지만, 2D 환경에서 주행하는 화면을 보는 것에 그쳐 실제 차량성능을 점검 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신규 구축된 VR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은 자동차 운행 환경까지 가상으로 구현했다. 부품 간 적합성이나 움직임, 간섭, 냉각성능 등을 입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번에도 VR장비를 착용하고, 가상의 디지털 차량에 탑승해봤다. 운전석에 앉아 전방을 비롯해 측·후방 및 운전석에서 각 장치들의 버튼까지의 실제 거리감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고객이 탑승하게 될 눈높이에서 주행 중 시야에 방해되는 장치들은 없는지, 움직임이 부자연스럽지는 않은지 등이 확인 가능해진 탓에 개발 과정에서 고객 편의성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됐다.

이 밖에도 운행 중인 차량의 절단면을 확인하거나, 거친 주행환경에서 주행 중 각 부품들이 원활히 작동하는 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주행 중 차량하부 등과 같은 실제 차량에서 불가능했던 검증이 가능해짐에 따라 실물 평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개발 차량의 문제점 및 개선사항 등을 파악해 설계에 즉각적으로 반영할 수 있게 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신차가 만들어지기까지 디자이너들이 차량의 내·외관을 구성하고, 엔지니어들이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 부문들의 협업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고 미래 모빌리티에 대한 개발 중요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그 중요성이 대두되는 각 부문의 협업, 문제점 발견과 보완책 마련, 그리고 신속한 의사결정 등을 VR 프로세스를 통해 가능하게 됐다”고 의의를 전했다.

아울러 해당 시스템 도입을 통해 품질향상뿐 아니라 비용절감 등의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통상 실물 시험차 생산 후 집중됐던 품질 검증이 선행 개발 단계부터 시작해 △디자인 △설계 △제조 △조립 등에 이르기까지 프로세스 전 과정에 적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향후 전 과정에 이 시스템이 도입될 경우 신차개발기간은 약 20% 앞당기고 개발비용은 연간 15% 이상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알버트 비어만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 사장은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강화는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 변화와 고객의 요구에 빠르고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한 주요 전략 중 하나”라면서 “품질과 수익성을 높여 연구개발(R&D) 투자를 강화하고, 미래 모빌리티 경쟁력을 높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그간 시범적으로 운영돼 온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는 미디어에 공개된 이날부터 본격 가동을 개시했다.

 

현대차그룹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사진=현대차그룹
현대차그룹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 사진=현대차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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