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시장 개척 주력해 다국적 기업으로 대우그룹 키워내
구조조정에도 끝내 1999년 그룹 해체···분식회계로 징역 선고받은 뒤 베트남서 인재 양성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 마련

1995년 1월 3일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회장(가운데)이 베트남 하노이시에 건립될 베트남-대우자동차 기공식에서 시삽행사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995년 1월 3일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회장(가운데)이 베트남 하노이시에 건립될 베트남-대우자동차 기공식에서 시삽행사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 50분 향년 83세 나이로 별세했다.

1936년생인 김 전 회장은 그야말로 한국 재계의 전설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66년까지 섬유회사인 한성실업에서 일했던 그는 만 30세 나이였던 1967년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이후 기업을 키워 19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그룹을 확장해 나갔다.

김우중 전 회장은 해외 진출의 선구자다. 지금 국내 대기업들에게 세계시장 진출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당시 황무지 같았던 기업들의 여건을 감안하면 상당히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김 전 회장은 1990년대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그는 국내를 넘어 해외로 뻗어나가길 바라는 기업인이었다.

대우그룹은 해체 직전인 19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달러로 당시 한국 총 수출액의 14% 수준이었다.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 현대에 이어 국내 2위였다.

허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리고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지며 대우그룹은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지게 됐다. 이후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도 발표했지만 위기를 넘기지 못해 결국 해체됐다.

성공신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김 전 회장은 이후 21조원대 분식회계 사건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제2의 고향 베트남에서 인재양성 등에 힘쓰며 노후를 보내다가 지난해 말부터 건강이 급격히 안좋아져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회장의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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