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붉은 광장은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산책을 즐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사진 속에 추억을 담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분주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한민족 오토랠리 2019, 조상의 부름’에 참가한 단원들이다.

7월 9일 모스크바에서의 출정식 / 사진=박정곤

 

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에서 대장정의 막을 올리다

러시아 동포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자동차 랠리단은 3.1 만세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음의 고향 한반도를 향한 노정을 세웠으며, 지난 7월 9일 붉은 광장 아래에서 성대하게 기치를 올렸다. 장장 70일에 걸친 한민족 랠리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몽골, 중국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세계 7개국의 한인과 현지인들이 참가했으며 이동 거리만 해도 총 3만km에 달하다 보니, 단원들은 그야말로 지구 둘레의 절반이 넘는 거리를 오직 차에 몸을 싣고 고향을 향해 달려야 했다. 랠리를 위한 준비는 거의 1년 전부터 진행됐다. 차량만 해도 구간 랠리 포함 총 10대나 되고 전체 인원도 40여 명에 달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출발을 알리는 함성과 함께 차량 대열은 모스크바강을 따라 러시아 남부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어느덧 러시아 특유의 대초원이 눈에 들어왔다. 자작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밀밭은 그 끝을 가늠할 수없을 정도로 넓게 펼쳐졌고, 군데군데 노란 물결로 넘실거리는 해바라기밭은 수확을 앞두고 태양의 기운을 받아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정체와 급작스러운 궂은 날씨 탓에 랠리단은 보로네시(Voronezh)를 지나 볼고그라드(Volgograd)까지 다다르는 데 꼬박 이틀을 소비했다. 볼고그라드는 과거에는 스탈린그라드라 불렀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 격전지이자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곳이다.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약 200만 명이 희생됐다. 밤을 보낸 랠리단은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마마예프 쿠르간(Mamayev Kurgan) 전쟁 기념 공원에 들러 전몰자를 기리며 참배했다. 공원 언덕에 오르니 저 멀리 볼가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러시아 대부분의 도시가 그렇듯 이곳 또한 강을 끼고 도시가 형성됐는데 도심을 가르는 볼가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뱃노래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볼가강을 따라 남하하던 랠리단은 초원 위에 세워진 불교도들의 땅 칼미크 공화국을 지나 카스피해에 인접한 아스트라한(Astrakhan)으로 넘어갔다. 카스피해는 내륙 가운데 있는 거대한 호수이지만 담긴 물이 염수(鹽水)이기에 엄연히 바다라 불리며, 러시아를 비롯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등 5개국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 37만km²에 달해 한반도 전체 면적보다도 훨씬 넓다. 한때 이곳은 세계적 희귀종인 철갑상어의 서식지로 유명했으나 현재는 석유와 가스등 자원 개발로 더욱 주목받는 곳이 됐다. 러시아는 동에서 서까지 총 11개의 시간대를 사용할 만큼 거대한 나라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사는 단원들도 정작 한 나라에 살고 있지만 머나먼 아스트라한을 방문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이곳에서 잠시 머물며 볼가강 밤낚시를 즐기고 싶다는 단원이 많았다. 하지만 카자흐스탄과의 국경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고, 첫 국경을 넘는다는 긴장감으로 인해 볼가강에서의 풍류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국경의 밤에는 정적이 흘렀다. 줄지은 트레일러와 흙먼지를 덮어쓴 채 보따리를 가득 멘 상인들, 그리고 기다림에 지친 군중의 아우성. 낮 동안 분주했던 국경의 광경은 해가 지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고 선선한 바람 속풀벌레 소리만 철조망을 따라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들었다. 굳게 닫힌 국경의 철문 탓에 오가는 이들이 없다 보니 국경 수비대도 초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국경의 밤엔 우리를 제외한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차를 고친 후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 우리는 해가 뜨고 나서야 아티라우(Atyrau)에 도착했다. 밤새 우리를 기다린 현지 동포들은 피곤한 기색 없이 반가이 맞이해 따뜻한 수프를 대접해주었고, 몇 시간이나마 몸을 누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단원들은 현지 동포들의 배려 덕에 꿀맛 같은 단잠을 청할 수 있었다. 바쁜 마음으로 재정비를 마치고 랠리단은 서둘러 국경을 넘어 우즈베키스탄의 고도 부하라(Bukhara)로 이동했다. 부하라는 산스크리트어로는 ‘부처의 도시’로, 소그드어로는 ‘행복의 땅’으로 번역되며 유목민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자 무엇보다 물을 찾을 수 있는 오아시스였다. 고도에서 잠시 여유를 누리고 우리는 사마르칸트를 지나 수도 타슈켄트로 향했다. 지나는 곳곳마다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명소들이 이어졌지만 랠리 본연의 뜻을 이어가야 하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타슈켄트 입성을 서둘렀다. 그간의 여행으로 쌓인 피로와 더위에 지친 몸은 하루가 달리 무거워졌지만 마음씨 좋은 동포 주인장이 말아준 시원한 타슈켄트 국수 한 그릇에 힘을 내어 우리는 랠리를 이어갔다. 다시 카자흐스탄을 거쳐 이틀 후면 알타이산맥과 대면한다는 생각에 설레는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영산 알타이를 넘어 몽골을 가로지르다

드디어 러시아 알타이의 최남단 국경 마을인 타샨타(Tashsnta)에 도달했다. 국경을 넘고 나니 몽골의 아름다운 풍광이 우리를 매료했다. 랠리단은 차간누르 마을과 알타이 시를 거쳐 울란바토르로 가는 노선을 택했는데 아직 비포장인 구간이 많고 산길을 헤치며 가야 하니 차는 이내 먼지투성이가 되고 바퀴는 바람이 빠지기 시작했다. 어둑한 저녁이 찾아왔고 안전을 위해 랠리단은 결국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야만 했다. 칠흑 같은 어둠에 이미더 운행하기 힘든 터라 여기서 노숙하는 것이 어떠냐는 논의가 한창 오갔다. 그 순간, 단원중 누군가가 하늘을 보라고 소리쳤고, 우리는 너나없이 경이로운 몽골의 밤하늘을 보며 잠시 넋을 놓았다.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알타이산 산등성이 위로 쏟아질 듯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아름다운 야경이었다. 이제껏 한 번도 이런 여유가 없었기에 아침이 오는 걸 아쉬워할 정도로 단원들을 설레게 한 밤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서슴없이 내몽고로 향했다. 만주의 국경 도시 만저우리(Manzhouli)로 들어가는 비행기는 아침 일찍 있었다. 두어 시간 비행을 마치고 드디어 만저 공항에 발을 내디뎠다. 거친 모래바람과 중앙아시아보다도 더한 열기가 온몸을 급습했고 이 때문인지 밖에서 오가는 이도 거의 없었다. 황야의 땅 만주. 과거 수많은 애국지사가 피를 흘려가며 이곳을 거점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설움의 땅. 한때 이곳은 고조선의 영토였고 고구려와 발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배경이 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런 역사적인 곳에 발을 딛는다는 자체가 처음에는 감격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게 한순간에 바뀌었다. 상상하던 만주는 아직도 광활한 벌판과 모래 언덕으로 가득 찬 곳이었건만, 상전벽해도 이런 경우가 없을 정도였다. 고층 아파트들이 밀집된 만저우리는 중국 내륙의 어느 도시보다도더 현대식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도시 주변 공원에는 대형 마트료시카 동상과 미니 크렘린등 러시아풍 건물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도로는 중국 어느 곳보다 잘 정돈돼 있었으며 차들은 대부분 수입차였다. 인구 25만 명의 비교적 작은 도시지만 러시아와 교역이 많은 터라 늘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여정은 달포를 넘기고서야 한반도를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에 몸을 싣고 고국을 방문했다. 마침내 대한민국 동해항에 도착하는 순간, 고난과 역경의 길은 뜨거운 환영 속에 순식간에 잊혔고, 모든 설움도 한순간에 씻겨나갔다. 피는 뜨겁고 진하다는 것이 몸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1 알타이를 가로지르며. 2 만저우리 시내 전경. 3 양을 팔러 나온 상인들.4 러시아 칼미크 공화국의 석가모니 황금사원 앞. / 사진=박정곤
1 알타이를 가로지르며. 2 만저우리 시내 전경. 3 러시아 칼미크 공화국의 석가모니 황금사원 앞. 4 양을 팔러 나온 상인들. / 사진=박정곤

 

글쓴이 박정곤(러시아 지역학자) 전 고리키문학대학교 초빙 교수. EBS <세계테마기행> 프리젠터. <우먼센스> ‘러시아 문학 기행’ 큐레이터. 

 

우먼센스 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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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정곤 (우먼센스 ‘러시아 문학 기행’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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