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대사전 편찬에 뛰어들어···“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 고문에 순국···“조선 사람이 조선말 쓰는 게 무슨 죄냐”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한징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한징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한징 선생은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말과 글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다. 선생은 반일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다. 여기서 선생은 표준어를 만드는 데 노력했다. 일제강점기까지 한국민족의 말과 문자에 표준어가 정해져 있지 않아 각 도의 사투리가 난무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극로와 함께 일제에 맞서 우리민족과 민족성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어대사전 편찬에 나섰다. 조선어대사전 편찬은 곧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선생은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1942년 체포됐다. 일제 고문으로 옥사했다.

한징(韓澄) 선생은 1886년 2월20일 서울 남부 죽동에서 태어났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신문 편집 기자로 일했다. 1923년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했다.

1921년 박승빈, 최남선 등이 계명구락부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1927년 조선어사전 편집부를 둔다.

조선광문회에 남겨진 말모이 원고를 가지고 있던 최남선이 계명구락부에서 사전 편찬 작업을 이끌어나갔다. 말모이는 1910년대 편찬된 최초의 현대적 우리말사전 원고다.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 선생 등 언어학자들이 참여해 편찬했으나 출판은 하지 못했다.

사전 집필에는 최남선, 정인보, 임규, 변영로, 양건식, 이윤재, 한징 선생이 참여했다. 최남선이 전문 어휘, 정인보가 한문 어휘, 임규가 용언 어휘, 변영로가 외래어 어휘, 양건식이 신어 어휘, 이윤재가 고어 어휘 및 주해, 한징이 주해를 맡았다.

그러나 1929년 들어 철자법의 불통일과 경비 부족으로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 작업이 중단됐다. 한징 선생은 이윤재와 함께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부를 탈퇴하고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참여했다.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 표준어 제정에 힘쓰다

한징 선생은 1929년에서 1932년까지 이윤재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조선어학회 회원이 됐다. 이후 선생은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 제정과 우리말 사전의 편찬에 헌신했다.

선생은 조선어학회가 1934년에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에서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일했다.

당시 일제강점기까지 한국민족의 말과 문자에 표준어가 정해져 있지 않아 각 도의 사투리가 난무했다. 표준어의 제정은 언어의 합리적 생활뿐 아니라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데 반드시 먼저 이뤄져야 할 일이었다.

이에 선생은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표준어 사정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

조선어학회는 1934년 12월 2일 임시총회를 열어 표준어 사정문제를 결의했다. 표준어 사정을 위한 독회(讀會)를 온양에서 열고, 사정위원은 회원 이외에 각 도별로 하되 서울말을 표준으로 하기에 서울 및 경기 위원이 총 위원의 반수가 되게 했다. 그 외의 반수는 방언에 대한 참고를 위해 각 도별로 위원수를 배정했다.

표준어 사정을 위한 독회는 1935년부터 시작해 1936년에 끝을 맺었다. 1935년 1월 온양온천에서 제1독회(1935.1.2)를 열고 미리 준비했던 사정안을 토의했다. 표준말 하나를 놓고 몇 시간이고 갑론을박 하기도 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의 민족적 권위를 확보하고자 사정위원 30명을 늘렸다. 지역적 안배도 고려해 교육계, 종교계, 언론계 등 조선사회의 각계각층 인사 총 70인을 선정했다.

서울·경기 출신 35인, 지방 출신은 각 도의 인구수 비례에 따라 35인으로 했다. 한징 선생은 서울 출신에 배정됐다.

1935년 8월 9일 경기도 우이동 봉황각에서 열린 8월 제2독회에는 30명의 위원이 출석했다. 여기 한징 선생도 참여했다.

우리 민족의 표준말을 처음으로 사정하는 작업은 지난한 작업이었다. 제2독회에 이어 1936년 7월 조선어학회는 제3독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32인의 위원이 참석해 수정위원이 제출한 토의안에 대해 토의했다. 다시 최종 수정위원 11명을 선정해 사정안 전체에 대해 수정했다.

이로써 표준말의 사정을 비로소 마쳤다. 사정을 마친 조선어학회는 ‘조선어학회 만세’를 삼창하고 폐회했다.

표준말 최종 사정회인 제3독회가 끝난 후 수정위원들은 3개월 동안 마무리 작업을 해 표준말 사정의 체계를 완성했다.

조선어학회는 1936년 10월 28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한글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했다.

표준어 6231개, 약어 134개, 비표준어 3082개, 한자어 100개로 사정 어휘 총수는 9547말 이었다. 이 날 조선어학회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도 발간했다. 이 책자는 표준어와 표준 철자를 찾아볼 수 있도록 편찬해 철자사전(綴字辭典)의 역할도 했다. 조선어학회는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이 표준어를 사용해 우리 말글의 통일에 앞장서 주기를 당부했다.

한징 선생은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에 기고하면서 우리말의 연구에도 참여했다. ‘한글’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어학회가 일제강점기 동안 발행한 기관지였다. 선생은 서울을 중심으로 우리말 땅이름을 연구해 ‘조선말 지명’(『한글』 48, 1937, 9.)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선생은 ‘군수의 꿈’(『한글』 66, 1939.4.)이라는 작품을 지어 백성의 재산을 빼앗던 악질 군수를 비판했다. 이 작품의 전체 문장은 한글로만 썼다. 부득이 한자어에 한자를 쓸 경우 괄호 안에 넣어 표기했다.

◇ ‘조선어대사전’ 편찬에 헌신하다

한징 선생은 조선어대사전 편찬에 힘을 쏟았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극로는 1929년 1월에 귀국해 민족어사전을 편찬하고자 했다. 이극로는 최현배, 장지영, 정열모 등의 협력을 받아 1929년 10월 31일 경성부 수표동 조선교육협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었다. 한징 선생도 사전 편찬에 함께 참여했다.

이들에게 조선어대사전 편찬은 언어 독립운동이었다. 일제에 맞서 우리민족과 민족성을 영구히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2년간 사전편찬원들은 각종 어휘를 분담 수집하면서 사전편찬 작업을 진행했다. 한징 선생은 한문계통의 어휘를 정리했다. 한징은 서울말에 정통해 사전편찬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러나 조선어사전편찬회는 사전 편찬 작업에서 1933년 6월부터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쳤다.

다행히 조선어학회가 사전편찬의 기초공작인 철자법 통일과 표준어 사정을 사회에 발표하자 사회인사들의 물질적 원조가 이어졌다. 1936년 경남 의령의 이우식은 1만원이 넘는 거액 자금을 기부했다.

사전편찬 후원회도 만들어졌다. 후원회원으로 이우식, 김양수, 장현식, 김도연, 이인, 서민호, 신윤국, 김종철, 설태희, 설원식, 윤홍섭, 민영욱, 임혁규, 조병식이 참여했다. 이극로가 이들 후원회원을 직접 찾아가 기탁을 받았다.

1936년 3월 20일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해온 사전편찬의 업무를 인계받았다.

조선어학회의 마지막 과제는 조선어사전 편찬이었다. 1935년 7월 조선어학회는 종로구 화동에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런데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매일같이 사무실을 출입했다. 일제는 사전편찬의 중요성을 알고 조선어학회의 인사들과 활동을 주시했다.

한징 선생은 1936년 4월에 조선어학회에 다시 참가해 1942년 9월까지 조선어대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36년 4월부터 정인승·이윤재·이극로·이중화 4인과 함께 사전편찬 전임위원이 됐다.

이석린에 따르면 당시 조선어학회가 주는 월급이 박봉이어서 한징 선생도 조선어학회에서 퇴근한 뒤 인쇄소에서 교정 일을 했다.

또 선생은 문세영이 단독으로 조선어사전을 만들 때 사전 원고의 교정을 마무리해 줬다. 이렇게 문세영은 한징 선생과 이윤재 등의 도움으로 제대로 된 우리말 사전인 ‘조선어사전’(1938)을 최초로 발간했다.

조선어대사전 편찬 시기 한징은 동지들에게 말했다.

“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

일제 말기 사전편찬원들은 일제가 기념을 막았던 한글날 기념행사를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몰래 했다. 일제는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이 한글날에 민족의식을 고취하자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이 행사를 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그럼에도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학회 사무실에서 몰래 이를 거행했다.

이윤재는 지방에서 찾아온 청년들에게 늘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 일본이 조선의 글과 말을 없애 동화정책을 쓰고 있으니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글과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 길이 후세에 전해야 한다. 말과 글이 없어져 민족이 없어진 가까운 예로 만주족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글을 써 두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해 두면,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후에 이것을 근거하여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고 또 민족운동이 되는 것이다.”

조선어사전 편찬은 민족 독립의 준비 차원에서 추진됐다. 당시 일제는 조선 민족 말살 차원에서 조선말 말살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조선어학회의 대표였던 이극로는 직원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어사전을 완성하여 내놓아 이것이 어느 구석에 박혔다가 후일 때가 돌아오는 날 민족의 말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말과 조선의 혼은 영원히 말살되고 마는 운명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니 끝까지 고생을 참고 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징, 이극로 등 사전편찬에 관여한 모든 이들의 노력과 고생으로 드디어 ‘조선어사전’의 원고가 나왔다. 우리말사전의 제목은 ‘조선어사전’이었다. 조선어대사전의 용어로 16만 어휘, 삽화 3000여 매를 완성했다.

조선어학회는 1940년 3월 7일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조선어대사전 출판허가원을 제출했다. 이 ‘조선어사전’ 원고는 많은 부분 일제로부터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1940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도서과의 출판 허가를 받았다.

조선어학회는 이우식의 재정 후원을 받아 1942년 봄부터 사전 원고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조판하게 했다. 이우식으로부터 매월 250원씩을 지원받기로 하고 나머지 어휘를 정리해 그 원고를 1942년 말까지는 인쇄소로 넘기기로 했다.

◇일제 자행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편찬 중단

그러나 1942년 10월 일제가 자행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편찬 작업은 중단됐다. 일제는 사전원고와 서적들까지 전부 압수했다. 사전 원고도 사전편찬원과 함께 함흥으로 옮겨졌다.

일제는 민족말살 차원에서 조선어를 말살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맞서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사들은 한글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 민중의 지지로 민족어 3대 규범집인 『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했다. 3대 규범집은 다가올 민족국가 즉 독립국가에서 곧바로 국어 규범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조선어학회는 민족어 규범으로 된 ‘조선어대사전’을 어떻게든 출판하고자 노력했다. 사전편찬은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는 효과를 갖고 민족정신을 높이기 때문에 항일 투쟁과 같다.

이에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학회의 사무실을 일곱 차례나 철저히 수색해 조선어학회의 회원 33명을 검거해 탄압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어 학자들을 가혹하게 고문하고 죽였다.

한징 선생도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1942년 10월 1일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금됐다. 투옥 중 일제 형사로부터 물고문을 받고 날마다 폭행을 당했다.

선생은 계속되는 고문에도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말을 쓰고, 조선말을 사랑하는 데에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항의했다.

결국 한징 선생은 1944년 2월 22일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사망했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일제 형사들로부터 6번이나 물고문을 당하고 날마다 폭행을 당한 이윤재도 1943년 12월 8일 고문으로 순국했다.

한징의 유골은 그의 처가 함흥감옥에서 찾아와 경기도 과천에 안장하였다.

해방 뒤 조선어학회가 재건돼 일제시기 완간하지 못한 조선어대사전 편찬 사업을 재개했다.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원들은 사전의 이름을 우리말을 살려 『조선말큰사전』 6권(1947∼1957)으로 바꾸어 출판했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한징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1992년 7월 9일 선생의 묘소를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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