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으로 국내 진공작전 통해 무장투쟁 힘써···25세에 순국
“동포 여러분들 끝까지 싸워 독립을 성취해 주시오”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이수흥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이수흥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이수흥(李壽興)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하 대한통의부, 참의부 등에 가담해 항일 무장투쟁을 했다. 특히 선생은 단독으로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실행했다. 고마령 참변으로 순국한 동지들의 원수를 갚고 조선총독부 총독과 고관들을 처단해 침체된 무장투쟁 분위기를 되살리고자 했다. 

이수흥 선생은 1905년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창전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4세에 입산해 수년 간 승려 생활을 했다. 부친의 만류로 하산한 선생은 19세인 1923년 3월 말 만주로 건너갔다. 선생은 만주 길림성에서 김좌진이 사관 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신명학교에 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선생은 1923년 7월 말 대한통의부에 가담해 무장투쟁 활동을 시작했다. 통의부는 1922년 8월 30일 만주에 만들어졌다.

통의부는 3.1운동 이후 남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단이 가장 폭넓게 통합해 만든 단체였다. 통의부는 무장투쟁을 주도할 군대로 의용군을 만들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선생은 통의부, 의군부, 참의부로 옮기며 무장투쟁을 했다. 선생은 참의부 제2중대 소속으로 중대장인 최석순의 직속 부하였다.

◇ 참의부의 무장투쟁···유격전과 국내진공작전

참의부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유격전 방식이었다. 참의부 독립군은 국제적 혹은 국가적 지원이 없었다. 막강한 일본군과 전면전은 할 수 없었다.

한민족 독립전쟁사에서 일관된 ‘유격전’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를 교란시키고 지속적으로 민중의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세계 우방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 방식이기도 했다. 실제로 독립군은 만주에서 일본 정규군 몇 개 사단의 발을 묶어 놓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참의부의 항일 유격전은 통의부 의용군에서 분립하면서 1925년까지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 시기의 대일항쟁은 주로 국내 진공작전이었다. 평안도 지방의 일제 관공서를 비롯한 경찰서·우체국·영림서 등 일제기관에 대해 기습전을 했다.

1925년 3월 고마령전투에서 일본 경찰의 기습으로 참의장이며 제2중대장인 최석순 등 참의부에 가담했던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참의부는 ‘미쓰야(三矢)협정’ 체결 이후 독립군들의 무기소지와 지도부의 체포 압박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비롯한 무장투쟁과 함께 중국 관헌의 단속에도 대비해야 했다. 미쓰야 협정은 1925년 6월 중국 봉천성 경무국장 우진(于珍)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스(三矢宮松) 사이에 체결됐다.

이에 참의부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은 1925년 이후 급속히 줄었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독립군의 국내 진공 횟수는 1924년 560여 건, 1925년 270건, 1926년 69건, 1927년 16건, 1930년 3건 등으로 급감했다.

선생의 재판기록에도 “피고 이수흥은 요즘 조선 독립의 기세가 쇠퇴하고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이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하여 조선 내에 잠입하여 총독 및 기타 대관 등을 암살할 것을 계획하고”라고 밝혔다.

보훈처는 “이수흥 선생이 실행했던 국내 진공작전에 의한 무장투쟁은 당시 침체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고, 1925년 3월 고마령전투에서 전사한 제2중대장 최석순을 비롯한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에서 수행됐다”며 “선생의 국내진공작전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됐다”고 설명했다.

◇ 이수흥 단독으로 국내에서 무장투쟁

이수흥 선생은 단독으로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실행했다. 이는 고마령 참변으로 순국한 최석순 참의장 등 29명 동지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과 국내에 침투해 조선총독부 총독과 고관들을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침체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계획이었다.

선생의 의거는 의열투쟁과 무장투쟁이 결합된 치밀한 독립투쟁이었다. 일제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하려는 것이 목적으로 의거의 성패 여부는 상관이 없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우리 단이 노리는 곳은 동경·경성 두 곳으로, 우선 조선총독을 계속해서 대여섯 명을 죽이면 그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게 될 것이고, 동경 시민을 놀라게 함이 매년 2회에 달하면 한국 독립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결국은 일본 국민 스스로가 한국 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고 말했다. 이수흥의 무장투쟁 의미도 이와 같았다.

1926년 5월 26일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였던 선생은 조선총독과 고관들을 처단하기 위해 참의부 제2중대의 근거지인 중국 봉천성을 떠났다. 모젤 권총 1정과 실탄 147발, 브라우닝 구식 권총 1정과 실탄 29발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했다.

선생은 경성으로 침투했다. 그러나 7월 10일 오후 10시 경성 동대문경찰서 산하의 동소문파출소 앞에서 보초 근무 중이던 일제 경찰 토쿠나가 마사루(德永勝)에게 권총을 소지한 것이 발각됐다. 선생은 즉시 모젤 권총을 꺼내 경찰에게 저격해 대퇴부 등에 중상을 입히고 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선생은 거사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동리에 거주하는 안성 부자 박승륙(朴承六)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으로 9월 7일 박승륙 가를 찾았다. 선생은 박승륙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에게 조선 독립운동을 위해 국내로 진공한 독립군인데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박태병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선생을 체포하려 했다. 선생은 재빨리 박태병에게 권총을 발사해 처단했다.

선생은 10월 20일 이천경찰서 현방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했다. 선생은 주재소 사무실로 들어가 조선총독부 도 순사부장 모리마츠 타게노(森松武之)의 흉부를 저격했으나 불발됐다. 이어 선생은 독립자금을 확보할 목적으로 인근에 있던 이천군 백사면사무소를 찾았다가 당시 숙직 중이던 면서기를 저격했다.

이처럼 선생은 7월부터 10월까지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중리 유택수·유남수 가에 머물면서 이들과 모의해 독립군 군자금 모집과 일제 경찰 등의 처단에 힘썼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음(訃音)을 들은 선생은 장례식에 비밀리 참석했다. 그러나 현상금에 눈이 어두운 매국노의 밀고로 선생은 일제에 체포됐다. 배후를 추궁하는 일제 경찰의 갖은 고문을 받았다.

선생은 3년여에 걸친 예심 끝에 1928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스스로 상고를 포기했다. 선생은 1929년 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아래는 선생의 최후 진술이다.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 주시기 바란다.”

국가보훈처는 “이수흥 선생의 거사들이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서울과 경기 일원에서 과감하게 수행됐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무장투쟁사의 쾌거다”며 “선생은 만주로 망명한 이후 한 번도 무장투쟁의 투지를 놓지 않고 일제와 싸우다 체포돼 끝내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무장투쟁의 화신이었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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