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피해자들 의견 반영 없이 일본에 ‘1+1안’ 제시···피해자들 “지금도 의견 반영 없어”
2015년 위안부 합의처럼 국가 간 합의 반복 우려···“포괄적 해결·日정부 불법행위 인정 및 사과 전제돼야”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열린 2018년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미소짓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열린 2018년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미소짓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을 강조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해법 논의에서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의견 교환은 했지만 이들이 요구한 ‘강제동원 피해자 전체에 대한 포괄적 해결, 일본 정부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사실 인정과 사과, 배상’ 의견은 무시했다.

정부는 지난 6월 19일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한일 양국 기업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출연해 피해자들에게 배상(1+1안)하자고 일본에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대변하고 지원하는 단체들에 따르면 정부는 1+1안을 내놓기 전에 이들 단체들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관련 단체들은 정부에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해법 원칙으로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원고 뿐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 전체에 대한 포괄적 해결 ▲일본 정부의 반인도적 강제동원 불법행위에 대한 사실 인정과 사과, 이에 따른 배상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 대법원 확정판결 피해자들에게만 한일 양국 기업이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위자료 해당액을 지급한다는 안을 일본에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 28일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는 “정부가 1+1안을 내놓기 전에 정부 측과 만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원칙과 의견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 대부분 강제동원 피해자분들이 90대의 노년이기에 모두가 소송 절차를 밝기 어렵다. 이에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원고 뿐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 전체에 대한 포괄적 해결을 요구했다”며 “그리고 일본 정부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인정과 사죄를 요구했다. 그러나 1+1안에는 이 모든 게 빠졌다. 1+1안은 일본 정부와 피고 기업에게 사죄와 반성보다는 누가 주든 피해자들은 그저 돈만 받으면 되는 존재인양 비춰지도록 해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에 큰 상처를 입혔다”고 말했다.

문제는 4개월이 지난 지금도 정부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표는 “이후에도 피해자들의 의견을 전달할 기회는 있었지만 의견이 반영이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업무를 맡는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도 “지금도 정부에서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문재인 정부가 지난 박근혜 정부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때와 같이 피해자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국가 간에만 합의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우려했다.

최근 이낙연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만나는 등 한일 간에 강제동원 배상판결 이후 발생한 수출규제 강화 조치 및 지소미아 종료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해법에 대한 졸속 합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다.

이 대표는 “2015년 위안부 합의 때와 같은 흐름이 예상 된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지소미아 종료 철회 등 압박으로 일본 정부와 강제동원 배상판결 해법에서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는 상황이 우려된다”며 “그러나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는 한일 양국이 합의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 원고가 분명히 존재하고 이들은 한국 정부에 자신들의 문제를 위임하지 않았다. 정부는 원고 등 피해자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실장도 “정부가 미국 등의 압박으로 위안부 합의 때와 같은 상황을 되풀이 해선 안 된다”며 “이것은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현 상황은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 온 피해자 중심주의의 원칙과도 어긋난다. 문 정부는 지난 2015년 위안부 합의 당시 피해자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며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치된 화해치유재단을 설립 허가를 취소했다.

지난 1월 여성가족부는 화해치유재단 설립 허가를 취소하면서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 아래 화해치유재단에 대한 다양한 의견수렴 결과 등을 바탕으로 재단의 해산을 추진하게 됐다. 여성가족부는 앞으로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명예·존엄회복을 위한 정책 추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18년 1월 정부는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에 대한 발표문을 통해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2015년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2017년 12월 문 정부의 위안부 합의 검토 TF 보고서는 “전시 여성 인권에 관해 국제사회의 규범으로 자리 잡은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위안부 협상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고, 일반적인 외교 현안처럼 주고받기 협상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 있는 동안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서 협의에 임했지만 협의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은 채, 정부 입장을 위주로 합의를 매듭지었다”며 “이번 경우처럼 피해자들이 수용하지 않는 한, 정부 사이에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했더라도 문제는 재연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에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은 “정부가 위안부 합의 때 놓쳤던 피해자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던 문제가 또 반복될 수 있는 상황이다. 위안부 합의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것도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강제동원 피해자 목소리를 수렴해 이 목소리를 근거로 일본과 협상해야 정당성을 갖는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 인권을 대변하는 정부를 선포하고 피해자 중심주의를 주장해왔다”고 말했다.

도 센터장은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도 일본과 협상에 임하기 전에 피해자 목소리를 먼저 정리해야 한다”며 “대법원 판결이라는 사법 주권에 더해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국제사회가 인정한 대원칙 하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토대로 했을 때 정부의 협상력이 커진다”고 밝혔다.

2005년 12월 유엔총회 결의에서 만장일치로 ‘피해자 권리 기본원칙’을 채택했다. 이는 국가 간 우호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피해자 중심 접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당시 일본도 찬성했다.

한편 지난 26일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면(88)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 할머니는 13살이던 1944년 일본 후지코시 공장에 가면 중학교와 전문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국민학교 교장의 말에 속아 근로정신대에 들어갔다. 이 할머니는 2015년 일본 전범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육체적·경제적 피해를 보상하라며 낸 손해배상 소송 1심과 항소심에서 이겼다. 그러나 후지코시가 다시 불복하면서 사건이 대법원으로 넘어간 사이 할머니는 사과도 배상도 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지난 26일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면(88)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 할머니는 13살이던 1944년 일본 후지코시 공장에 가면 중학교와 전문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국민학교 교장의 말에 속아 근로정신대에 들어갔다. / 사진=연합뉴스
지난 26일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면(88)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 할머니는 13살이던 1944년 일본 후지코시 공장에 가면 중학교와 전문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국민학교 교장의 말에 속아 근로정신대에 들어갔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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