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구는 말도, 행동도, 생각도 조용하다. 그렇게 차분하게, 엄태구는 무엇을 만들어갈까

검은색 상의는 김서룡 제품. /사진=김선익

 

엄태구가 조용히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스윽 다가와서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커튼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며 어느새 옷도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받았다. 그 모습을 보고 ‘원래 이렇게 조용해요?’를 첫 질문으로 해야지 마음먹었다. 그가 연기했던 <밀정>의 하시모토나 <구해줘2>의 김민철을 이렇게 차분한 사람이 어떻게 꺼냈을지 궁금했으니까. 성격대로 연기하는 건 아니지만, 보통의 배우라면, 배우니까 드러나 보일 톡톡 튀는 달란트가 꽁꽁 감춰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여느 배우들과는 달랐는데, 그모습이 엄태구를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준비한첫 질문에 엄태구는 어떻게 대답했냐고? ‘하하하’였다. 덧붙이자면 특유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하하하. 아차!

평범한 사람 같아서, 그래서 불쑥 물어봤다. 원래 조용한 사람인지.

내가 말주변이 없다. 긴장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 평범하기도 하고. 하하. 그래서 <잉투기>의 ‘태식’ 같은 현실에 있을 법한, 평범한 역할을 연기하는 게 좋았던 때가 있었다. 익숙하니까.

조용한 성격을 묻는 다음 질문은 ‘상반되는 강한 캐릭터들을 어떻게 찰떡같이 잘 표현해냈나’였다. 예상과 다르게 ‘하하하’에 막혔지만.

사람이 휙! 하고 막 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글쎄. 내 안에 여러 캐릭터가 있다면 연기할 때 마음 놓고 한 번 꺼내보는 거? 그런 생각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잘되면 좋은데, 마음처럼 안 될 때도 있고 그래서 연기가 힘들다.

엄태구 안에 있는 캐릭터들 중에 가장 엄태구다운 건?

지금 인터뷰 나누고 있는 모습. 평범하고 뭐. 하하.

<구해줘2>가 최근에 끝났다. 평범한 엄태구는 어떻게 쉴까.

강아지랑 놀고. 친구들 만나고. 교회 가고 그런다. 정말 평범하지? 그런데 요즘에는 새 작품 준비하느라 조금 바쁘게 지내고 있다.

어떤 작품?

<구해줘2> 끝나고, 지금은 영화 <낙원의 밤>을 준비하고 있다. 많이 먹고, 살 찌우고 있다. 몸을 좀 키워야 하거든. 그래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어깨가 좀 불편해서 재활 병원도 다닌다. 말하고 보니까 스케줄이 꼭 운동선수 같은데? 하하.

<구해줘2> 정말 재밌게 봤다. 스토리 전개가 굉장히 새로웠다.

재밌게 작업했다. 그래서 그런지 촬영이 다 끝나고 나선 여느 때와 달랐다. 다른 작품은 보통 찍고 나면 그냥 끝이거든. 후련하고. <구해줘2>도 물론 시원섭섭했는데, 여운이 좀 짙었다. 길었고.

왜 그랬을까?

3~4개월 동안 홍성에만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정말 촬영장과 숙소만 오갔다. 현장에서 연기하고 숙소에 돌아오면 바로 다음 회 대본을 봤다. 그러니까 온전히 하루를 작품 안에서만 머물렀다. 그동안 촬영했던 작품들 중에서 회차도 가장 많았고. 그렇게 생활하다가 서울로 돌아왔으니 낯설었던 것 같다. <구해줘2> 캐릭터들이 꼭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고…. 오히려 서울이 편하지 않은 느낌? 아직도 홍성에 있는 것 같고. 아무튼 묘했다. 지금은 괜찮아졌다.

크림색 니트와 남색 재킷 모두 네이비스튜디오 제품. /사진=김선익

 

10월에 영화 <판소리 복서> 개봉을 앞두고 있다.

기대된다. 잘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도 아직 못 봤거든. 하하!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회를 열었는데, <구해줘2> 촬영이 한창일 때라서 참석을 못했다. 어떻게 나왔을지 너무 궁금한데, 다행히 내가 궁금한 걸또 잘 참는다.

원작은 어땠나? 2014년에 개봉한 단편 <뎀프시롤:참회록>을 장편으로 리메이크한 걸로 알고 있다.

굉장히 신선하고 재밌게 봤다. 당시 장편 시나리오가 나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궁금했다. 원작을 보면 알겠지만 캐릭터들의 개그 코드가 정말 새롭거든. 소재도 ‘웃픈’ 얘기들로 연속되고. 원작이 가진 특유의 색이 엄청 매력적이다. 기회가 되면 꼭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촬영에 합류하게 됐다.

재밌게 본 작품에 출연하게 됐을 때. 부담이 꽤 클 것 같다.

그렇지. 일단은 단편에서 캐릭터들이 다 강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그 캐릭터를 그저 따라가게 될 것 같았다. 그부분을 가장 조심했다. 그래서 나만의 ‘병구’를 만들자 싶어서 가장 기본적인 복싱부터 미친 듯이 연습했다. 기본기를 다져야 그에 더해 ‘병구’만의 새로운 스타일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원작과 다른 새로운 ‘병구’가 기대된다.

처음부터 새 캐릭터라고 생각하고 접근했다. 대본은 단편, 장편의 구성만 다르고 시나리오는 같을 수 있겠지만, 캐릭터는 얼마든지 대본 안에서 변할 수 있으니까. 그냥 자유롭게 병구를 표현하고 싶었고, 감독님도 그렇게 하도록 많이 도와주셨다.

극 중에서 ‘병구’는 판소리 장단에 복싱 스텝을 밟는다. 처음 들었을 땐 새로운 걸 넘어서 독특했다.

나도 그랬다. 판소리 복싱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고민 끝에 하나씩 해보기로 한 거지. 복싱부터 열심히. 극 중에서 ‘병구’는 단순히 판소리 장단에 스텝을 밟는 복서가 아니라, 그 스텝으로 세계 챔피언을 꿈꾸는 사람이다. 진지한 캐릭터다. 자기 스텝에 확신도 있고. 그러려면 나도 새롭게만 느껴선 안 될 것 같아서, 열심히 만들어갔다. ‘병구’의 꿈, 노력, 간절함이 전달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캐릭터 ‘병구’를 굉장히 촘촘하게 해석했다.

병구가 굉장히 엉뚱하다. 그게 매력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어린아이 같은 모습도 있다. 그만큼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캐릭터들이 전부 재밌고, 개그 코드도 분명한데, 단순히 웃긴 캐릭터가 아니라 순수해서 웃긴 거다. 무모해서. <판소리 복서>의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라면 이런 것들이다.

그렇게 완성한 엄태구의 ‘병구’. 만족하나?

내가 아직 영화를 못 봐서…. 그런데 만족한다. 다른 건 둘째치고 복싱만 놓고 봤을 때는 그렇다. 내가 복싱을 엄청 잘했다는 건 아니고,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할수 있는 한 최선은 다했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매일 복싱만 했으니까. 그래서 덩달아 복싱 코치님이 고생이 많으셨다. 갑자기 죄송하기도 하고…. 하하!

엄태구도 ‘병구’처럼 무모한 도전을 해본 적이 있을까?

지금 하고 있다. 연기. 하하하! 우연히 첫 출연한 단편 영화를 보게 됐는데, ‘연기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못보겠더라. 민망하다. 그때가 스물한 살? 그때부터 계속 하고 있지 뭐. 무모한 도전.

무엇이 엄태구의 ‘무모한 도전’을 계속하게 만들까. 원동력 같은…?

내게 가장 커다란 힘을 주는 건 신앙이니까, 믿음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연기 외에 관심 있는 것도 없고. 그래서 어느 순간 다른 것도 할 수 없는 거지. 그래서 꾸준히 하게 됐다. 그런데 정말, 내가 잘하는 게 별로 없다.

꾸준히 하는 게 잘하는 거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지금 10년 전을 돌이켜보면 ‘와, 그래도 좀 성장한 거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계속 열심히만 했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몰랐는데 아무튼. 지금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작품을 통해 평가받아야 하는 것같다.

그 과정에서 좋은 영향을 받고 다시 열심히 거듭나야 하고.”

 

코트와 노란색 셔츠는 모두 르메테크 제품. /사진=김선익<br>
코트와 노란색 셔츠는 모두 르메테크 제품. /사진=김선익

 

스물한 살의 엄태구와 지금의 엄태구에게 연기는 여전히 재밌는 일이고.

그럼. 늘 재밌고 즐겁다. 동시에 항상 어렵고. 상황마다 정도 차이만 조금씩 있는 것 같다. 설레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가끔씩은 부담감, 기대감, 즐거움 모든 감정이 한 번에훅 들어오기도 하고. 그렇게 하나씩 감정을 다듬으면서 연기하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이 딱 그 상태다. 새 작품도 앞두고 있고.

최근 인터뷰에서 ‘연기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연기를 잘한다는 건 어떤 걸까?

진정성 있게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 배우만의 스타일로 표현해내는 것일 수도 있고. 교집합을 찾자면 공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연기. 아, 그런데 잘 모르겠다. 그냥 말한 건 아닌데 정리가 잘 안 된다. 정답은 없는 것같다. 연기를 본 관객이 가장 잘 아실 테니까. 배우는 역시 작품을 통해 평가받아야 하는 것 같다. 배우는 그 과정에서 좋은 영향을 받고 다시 열심히 거듭나야 하고.

쉬운 게 없다.

정말, 쉬운 게 없다. 시간도 빠르고.

연기 잘하는 배우 엄태구 말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을까.

사람이 중요한 것 같다. 예전에 연기를 계속해야 하나 싶을 때가 있었다. 영화 <밀정> 촬영을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송강호 선배님하고 작업하면서 바뀌었다. 연기 계속하고 싶다, 해봐야지, 하는 에너지를 얻었다. 용기 비슷한. 나중에는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아니, 돼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연기 잘하는 배우가 돼야겠고.

꽃무늬 수트와 녹색 셔츠 모두 에트로, 스카프는 김서룡, 로퍼는 자라 제품. /사진=김선익

 

 

아레나 2019년 10월호

https://www.smlounge.co.kr/arena

EDITOR 신기호 PHOTOGRAPHY 김선익 STYLIST 양희화 HAIR 백가영 MAKE-UP 백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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