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으로 일본 국권침탈 맞서···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활동
안중근 의거에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효도다”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조마리아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조마리아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조마리아 선생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일본의 국권침탈에 맞섰다. 아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투옥되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한 죽음을 맞이하라고 수의를 지어 보냈다. 선생은 이후 중국에서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 위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힘썼다.

조마리아 선생은 1862년에 황해도 해주군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군 광석동에 살던 안태훈(安泰勳)과 혼인했다.

안태훈은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했다. 개화파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했다. 안태훈은 1896년 가을 명동성당을 찾아가 천주교에 귀의했다. 이에 조마리아 선생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됐다.

조마리아 선생과 안태훈은 중근, 성녀, 정근, 공근 등 3남 1녀의 자녀를 뒀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해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마련했다. 안공근은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다. 안성녀는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조마리아 선생과 그의 자식들 모두 독립운동에 힘썼다.

◇ 국채보상운동 참여해 국권 회복 노력···안중근과 민족교육운동 매진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 대한제국이 위기에 처하자 안태훈과 안중근 부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다. 1905년 가을 안중근은 중국의 상해로 이동했다. 안태훈은 남은 가족과 함께 평양의 관문인 진남포로 이주해 안중근의 귀국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안태훈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마리아 선생은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아들들을 따라 진남포로 갔다.

안중근은 1906년 봄 진남포로 돌아와 동생들과 함께 애국계몽 운동을 했다. 삼흥학교를 세워민족교육에 매진했다. 천주교 학교인 돈의학교를 인수했다.

안중근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의 운영에 필요한 재원의 일정 부분은 할아버지인 안인수에게 물려 받은 유산을 이용했다. 이는 조마리아 선생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마리아 선생은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서상돈(徐相敦)은 일본에서 빌린 국채 13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나라를 잃을 것이라며 2000만 동포 모두가 참여하는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했다.

안중근은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만들었다. 1907년 2월 평양 명륜당에서 1000여명을 대상으로 국채보상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안중근은 자신의 가족이 가진 패물을 모두 국채보상금으로 냈다. 동생 안정근, 안공근도 국채보상 의연금을 냈다.

어머니 조마리아 선생도 이에 적극 참여했다. 1907년 5월 조마리아는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의 제2차 의연활동에서 은장도, 은가락지, 은귀걸이 등 20원 상당의 은제품을 냈다.

◇ 안중근 의거에 “옳은 일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라”

조마리아 선생은 1907년 7월 안중근이 독립운동을 위해 작별을 할 때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고 말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국가보훈처는 “안중근의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국내외 독립운동가는 물론 만청정부 타도운동을 벌이던 중국의 혁명운동가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며 “나아가 일제의 한국침략을 주시하던 서구 열강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일대사건이었다”고 의미를 밝혔다.

그러나 이 일로 안중근의 가족들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안중근의 동생 정근과 공근은 안중근 의거 관련 혐의로 일제에 체포돼 한 달 넘게 감옥에 갇혔다. 이후 정근과 공근은 뤼순의 안중근을 면회하기 위해 찾았지만 일제가 이들을 가두고 때렸다.

조마리아 선생은 평양으로 가 안병찬(安秉瓚) 변호사에게 아들의 변호를 요청했다. 이때 평양 헌병대와 경찰서는 조마리아를 추궁했다. 그러나 조마리아는 안중근이 진실한 애국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일제의 추궁을 반박했다. 조마리아는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판결하자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다”고 비판했다.

조마리아 선생은 뤼순감옥으로 안중근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고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선생은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전했다.

조마리아 선생은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을 통해 흰색 명주 수의를 안중근에게 보냈다.

◇ 러시아에서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식 깨우다

조마리아 선생은 안중근 순국 이후 러시아로 가서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일깨웠다.

1910년 5월 선생은 안중근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로 갔다. 조마리아 등 안중근의 유족은 연해주 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안중근 유족 구제공동회가 모금한 기금이 크라스키노의 한인지도자 최재형을 통해 안중근 유족에게 전해졌다.

안정근·공근 형제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보내준 자금을 바탕으로 1919년부터 니콜리스크에서는 최초로 벼농사에 성공했다. 안정근은 니콜리스크에 대규모 농장을 만들어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

조마리아 선생도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독립신문’ 1920년 1월 30일자는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해외에 온 이래 거의 쉬는 날이 없이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를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러시아 동부 각지를 돌며 동포들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강연활동과 방문활동을 했다.

◇ 상해 임시정부 재정적 지원하다

1919년 3.1운동의 결과 국내외 각지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중국 상해에도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안정근은 1919년 11월 아들 원생, 형 중근의 자녀인 현생과 준생, 동생의 큰아들 우생을 데리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안공근은 임시정부의 러시아 외교특사가 됐다. 안정근은 임시정부 북간도 특파원으로서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단체를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조마리아 선생은 상해에서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과 친하게 지냈다. 이들의 인연은 1895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남편 안태훈은 동학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관군의 추격을 받던 김구와 그 부모를 자신의 거처인 청계동으로 데려와 보호했다. 이를 계기로 조마리아와 곽낙원이 친분을 쌓았다. 이에 안공근 등 안중근 유족이 김구의 최측근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됐다.

조마리아 선생은 본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음에도 임정 후원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임시정부경제후원회’의 위원으로서 적극 활동했다.

선생과 함께 생활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조마리아 선생은 1927년 7월 15일 상해에서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상해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도시개발로 묘지터가 개발되면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됐다.

대한민국정부는 조마리아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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