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단실기’, ‘신단민사’ 저술 통해 민족사 정통성 체계화···항일 무장투쟁 통해 청산리 대첩 승리도 지원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김교헌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김교헌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김교헌 선생은 '신단실기', '신단민사' 등의 저술을 통해 민족주체 역사관을 정립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화했다. 신단실기는 대종교 종리에 관한 것으로 민족종교의 교리와 단군사(檀君史)를 밝힌 것이다. 일제에 나라는 빼앗겼으나 우리에게는 유구한 민족의 시조와 민족사, 민족 고유 종교가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선생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조선광문회 등에도 참여했다. 만주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기도 했다. 1920년 10월 홍범도, 김좌진 장군 등이 청산리대첩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지도했다.

김교헌 선생은 1867년 7월 5일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에서 부친 김창희(金昌熙)와 모친 풍양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원(茂園)이다. 대종교에 입교한 후 이름을 외자 헌(獻)으로 바꾸었다.

선생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선생의 7대조 김주신(金柱臣)은 숙종의 장인이었고 어머니는 풍양 조씨로 판관을 지낸 조희필(趙熙弼)의 딸이다. 자택은 영조 때 왕자궁으로 쓰였던 340칸 대저택을 하사 받았다. 김교헌은 훗날 독립운동을 위해 전 가산을 처분했다.

선생은 18세인 1885년 정시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했다. 그 후 권지부정학(權知副正學)·예조참의(禮曹參議)·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등을 지냈다.

◇ 독립운동에 뛰어들어···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조선광문회 이끌다

김교헌 선생은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중계몽운동을 했다.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이 뜻을 이루지 못하면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됐다. 이 후 선생은 대표위원으로 선정돼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03년 문헌비고찬집위원(文獻備考纂輯委員) 편집위원이 됐다. 이 때 선생은 다양한 책을 접하고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선생이 5년에 걸쳐 완성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는 상고시대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리한 책이다.

선생은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東萊監理兼釜山港裁判所判事)와 동래부사로 재직했다. 선생이 항일의식을 갖게 된 때가 이 즈음으로 여겨진다. 선생은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다가 일본인들의 횡포와 친일파 송병준(宋秉畯)의 모함으로 해직됐다.

선생은 해직된 후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을 시작했다.

◇ 대종교 입교···저술 통해 민족주체 사관 정립

단군교는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교명(敎名)을 바꾸고 포교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에 집중했다. 대종교는 단군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종교로 일제침략에 대항한 항일투쟁에 적극 뛰어들었다. 한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도 했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의정원 의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과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

신규식(申圭植)·김두봉(金枓奉)·박찬익(朴贊翊)·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김좌진(金佐鎭)·지청천(池靑天)·이범석(李範奭)·홍범도(洪範圖)·이상설(李相卨)·안희제(安熙濟) 등 대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김교헌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했다. 선생은 대종교에서 1914년 남도본사 전리(南道本司典理), 1915년에 남도본사 도강사(南道本司都講師) 및 전강(典講) 등 중책을 맡으면서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를 썼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신단실기는 대종교 종리에 관한 것으로 단군을 종조로 내세워 민족종교의 교리와 단군사(檀君史)를 밝힌 것이다. 일제에 나라는 빼앗겼으나 우리에게는 유구한 민족의 시조가 있고 민족사가 있으며 민족의 고유한 종교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종교서였다. 민족혼을 일깨우는 국사서였다.

김교헌 선생은 신단민사의 시대 구분에서의 목차 중 근고(近古)에서 요금(遼金)도 포함시켰다. 만주를 지난날의 역사에서 우리 영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선생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체계화했다.

보훈처는 “이 두 저서는 우리의 건국 시조인 단군과 대종교를 연결시켜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규명했다. 이는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세워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을 없애고 민족주체 사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며 “김교헌 선생의 학문은 후에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의 민족사학(民族史學)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김교헌 선생의 서적은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선생은 1916년 9월 1일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교주에 취임했다. 그러나 일제는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제령 제83호로 ‘포교규칙’을 발포(發布)하고 대종교를 종교가 아니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선생은 나철이 순교한 다음해인 1917년 3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和龍縣) 대종교 총본사로 망명했다. 망명 후 선생은 교단 정비와 교세 확장을 주도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추진했다. 교단 하부조직인 46개소의 시교당(施敎堂)을 설치하고 민족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 대한독립선언서 선포하다···민주공화제·한일합방 무효 선언

1919년 2월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 등 39인은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 주체는 만주지역 항일무장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다. 선언서 내용에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가 언급돼 있고 발표장소도 대종교 총본사인 것으로 미뤄 대종교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39인 중에서 이세영(李世永)·한흥(韓興)·최병학(崔炳學)·이승만(李承晩)·김약연(金躍淵)·이대위(李大爲)·황상규(黃尙奎)·안창호(安昌浩)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대종교 중심 인사들이었다. 선생은 대한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서명하며 중심 역할을 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라고 밝혔다.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둔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외세의 지배를 절대 받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방하고 세계 각국에 대해 ‘한일합방’이 무효임을 강조했다.

국내에서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선생은 1919년 3월 24일 안도현(安圖縣)에서 대종교도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안도현 덕수동 자신의 집을 방문한 대종교도와 학생 50여 명과 함께 독립운동 대책을 논의했다.

◇ 만주 항일무장투쟁을 이끌다···청산리대첩 승리 지도

1919년 10월 대종교 교인을 중심으로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가 만들어졌다. 김교헌 선생은 1920년 10월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 등이 청산리대첩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지도했다.

대한군정서는 1919년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한 후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연합했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10월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했다. 이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대적인 병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했다. 서일은 동포들의 희생을 줄이고 장차 연해주로 이동하기 위한 전략으로 대한군정서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인 밀산(密山)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밀산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서일이 순국했다.

김교헌 선생은 1922년 청산리대첩 이후 흩어졌던 대종교도들을 모아 본부를 밀산에서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겨 대한군정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종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당시에 희생 당한 대종교도들만 수만 명에 달했다. 김교헌 선생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 총본사를 영안현으로 옮겨 선도포교사업을 통한 구국투쟁에 노력했다. 1923년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출간해 민족 의식을 북돋았다.

그러나 만주 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약화됐다. 선생은 서일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병을 앓다가 1923년 11월 18일 영안현 남관(南關) 대종교 총본사 수도실에서 윤세복(尹世復)에게 도사교(교주)의 지위를 물려준다는 유서를 남기고 5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24일 ‘무원 김교헌선생(茂園金敎獻先生)’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선생은 무언(無言)한 애국자였섯다. 그가 말이 없으나 조선과 조선인을 어떻게 깊이 사랑하였던 것은 그의 일생 생활이 증명한다. 선생은 가위(可謂) 문한가(文翰家)의 예(裔)로 한학에 자못 조예가 깊었음은 지인이 모두 경앙(敬仰)하여 하는 바이어니와 그에게는 한학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그의 사랑하는 조선민족의 역사와 사상과 문학을 탐구하고 표창한 만이 그에게 의미가 있었다. 조선의 역사에 관한 것이면,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수집하였고, 조선인의 저작이라 하면 편언척구(片言隻句)라도 등한히 아니하여 그 속에서 조선인의 생명과 정신을 찾으려하였다. 그가 빈한하여 의식을 구하기에 분망한 동안에도 조선광문회의 조선고서 간행에 수년간 편찬과 교정의 격무(激務)를 사향치 아니함도 실로 이 '무언(無言)의 민족애(民族愛)'에서 나온 것이다.

대세가 변(變)하고 민심이 날로 부박(浮薄)하여져서 조종(祖宗)의 정신을 잊으려함을 볼 때에 그의 통심(痛心)함이 얼마나 하였스랴. 그는 조선을 가장 잘 연구한 학자요,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애국자이기 때문에 '조선정신'의 미점(美點)도 가장 잘 포착(捕捉)하고 애착(愛着)하였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조선정신의 시조인 단군에 대한 귀의찬앙(歸依讚仰)의 종교적 열정으로 화(化)한 것이다. 전교도의 숭앙(崇仰)을 받던 선생의 장서(長逝)에 대하여 대종교의 애도하여 말할 것도 없고, 진정한 애국자요, 다시 구하기 어려운 국학자를 잃은 것에 대하여는 전민족적 손실로 애도의 뜻을 표할 것이다. 진실로 선생은 애도할 만한 '참된 조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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