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편가르기식 화법 자중하고 소극적 정치 참여층도 신경 써야

“저의 부족함이나 불찰 때문에 국민들께서 많은 실망감을 가졌을 텐데 국민들께서 저를 꾸짖으시면서도 촛불을 드셨다. 검찰 개혁이란 시대적 과제, 역사적 대의를 위해 모이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서초동 집회에 대한 지난 1일 조국 법무부장관의 대정부질의 답변)

“사상 초유의 일가족 사기 행각, 위선과 독선에 온 국민이 분노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유모차를 밀던 손도, 가게를 열던 손도, 펜을 잡던 손 모두 하던 일을 제쳐 두고 태극기를 들었다.”(지난 9일 광화문 집회에 대한 이창수 자유한국당 대변인 논평)

서초동과 광화문, 두 집회에 대한 정부여당 측과 야당의 평가다. 양쪽 모두에서 ‘국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지칭하는 대상은 전혀 다르다. 정치권은 마치 반대 집회 의견은 아예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한쪽은 서초동, 다른 한쪽은 광화문에 모인 이들의 외침을 ‘국민의 뜻’이라고 각자 결론짓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치권이 잊어선 안 될 존재가 있다. 바로 어느 집회에도 나오지 않은 국민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조국 및 검찰개혁 논란에서 배제돼 있지만 ‘절대 다수’다. 집회 인원이 수십만이니 수백만이니 하며 경쟁하듯 숫자를 이야기하지만 이들의 수는 수천만이다.

집회에 나가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적극적으로 정치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집회에 나가지 않은 이들은 나간 이들보다 해당 이슈 참여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먹고살기 바빠 거대한 정치논란에 신경 쓸 정신적 여유가 없거나, 남는 시간만큼은 좀 쉬고 싶거나, 어느 쪽이 잘못했다는 느낌은 있지만 집회에 나갈 정도의 생각은 들지 않거나, 양쪽 주장 모두 싫거나 등등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 소극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정치판의 승패를 결정지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정치의 승패를 가르는 무대는 결국 선거판이다. 이 선거판에선 얼마나 많은 절대 다수의 소극적 정치 참여자들을 내 편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대한민국 선거의 승패는 늘 그 지점에서 갈렸다. 어차피 투표소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열렬한 지지자들도 1표고, 소극적 지지를 보내는 이도 1표다.

이 소극적 정치 참여자들을 정치권에선 ‘중도층’이라고 묶어 표현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중간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안마다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다른 것이다. 어쨌든 선거철이 되면 정치권은 이들에게 슬슬 스킨십을 시도한다.

아무리 총선이 아직 반년 정도 남았다고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정치권을 보면 이 소극적 정치 참여자들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한 모습이다. 더 많은 범주의 이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보다 적극 지지층을 결집시키는데 집중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소극적 정치 참여자들이 싫어하는 과격한 용어와 편가르기식 표현, 튀는 행동이나 언행이 난무한다.

정치 참여에 소극적인 이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속에 마일리지를 쌓고 있다. 그리고 투표 날 더 미운 쪽이 이기는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한 표를 행사할 것이다. 확연히 느껴지는 광장 민심도 무섭지만, 결국 늘 보이지 않는 투표민심에 울고 웃어왔다는 정치권을 잊어선 안 된다. 집회엔 나가지 않는 이들도 투표는 하러 간다. 참고로 지난 19대 대선 때 투표소를 찾은 이들의 수는 약 3280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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