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협회 및 대한신민회 활동···국권 회복·이완용 처단 계획·독립만세운동 전개 노력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임치정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임치정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임치정(林蚩正) 선생은 일제강점기 재미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공립협회와 대한신민회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 활동과 이완용 처단 계획 등에 노력했다. 1906년 선생과 공립협회 임원진은 일본 영사의 간섭 행위에 대해 통고문을 발표해 일본영사로부터 한인사회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07년 의병전쟁 후 선생과 공립협회 임원진은 신민회 결성과 매국노 처단을 적극 지원했다. 선생은 1919년 진남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하와이에서 항일운동 단체 신민회 창립

춘곡(春谷) 임치정 선생은 1880년 평안남도 용강군 산남면 홍문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에 자원해 아내를 고국에 남겨두고 혼자 미국으로 갔다. 선생은 하와이 호놀룰루의 사탕농장의 노동자로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선생은 1903년 8월 7일 홍승하, 윤병구, 안정수, 이교담, 박윤섭, 문홍석, 임형주, 김정국 등 주로 기독교 감리교 출신 인사와 유학생들과 함께 구국정신 고취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미주 최초의 정치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세웠다.

신민회 창립 후 선생 등은 동족 단결, 국정 쇄신을 강령으로 설정하고 홍승하를 회장으로 선임했다. 1903년 12월 2일에는 하와이 카우아이(Kauai)와 카파(Kapaa) 지방에 지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하와이 성공회 계열의 김익성, 최윤백 등이 회(會)의 명칭이 ‘신민(新民)’이라는 점과 강령에 ‘국정쇄신’을 내건 점을 거론하면서 이는 대한제국정부를 전복하려는 반역행위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한인 간 정치의식 차이와 종교적 분파 등으로 인한 분열로 신민회는 1904년 4월 20일 해체됐다.

◇공립협회 만들어 독립운동···일제의 한인 사회 통제 극복

선생은 신민회 해체 즈음인 1904년 미국으로 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선생은 1903년 안창호 등이 결성한 친목회에 가입했다. 당시 임치정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 노동주선소와 야학을 설치했다. 안창호, 이강, 임준기는 리버사이드에 노동주선소와 야학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하와이에서 건너오는 한인들의 취업을 돕고 의식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한인 사회의 생활 개선 운동과 한인 지역사회 구현 활동을 했다.

1905년 1월 일제는 호놀룰루 주재 일본 총영사 사이토(齋藤幹)를 대한제국 명예총영사로 임명해 재미 한인들을 통치하려했다. 이 해 4월에는 한인의 하와이 이민을 금지시켰다.

이에 임치정 선생은 안창호 등과 함께 일제의 재미한인 지배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 설립을 논의했다. 1905년 4월 5일 임치정 선생과 안창호, 송석준, 임준기, 이강, 방화중 등 49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항일운동과 동족 지원을 목적으로 공립협회를 만들었다.

또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서기와 학회 제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의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05년 11월 고종의 특사 헐버트가 공립협회를 방문해 을사조약 강제체결 움직임을 전했다. 이에 선생 등 공립협회 임원진은 본격적인 민족운동노선으로 전환했다. 선생은 안창호 등과 함께 대한제국의 영사관을 대신할 자치기관 설립과 국권 회복 방안을 궁리했다.

이에 1905년 11월 공립협회 총본부인 공립관을 설치하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창간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리버사이드, 레드랜드, 로스엔젤레스 등 미국 서해안 일대에 지회를 세웠다.

임치정 선생은 ‘공립신보’ 간행을 도왔다. 공립신보사 회계로 근무하면서 열악한 재정을 충당했다.

1906년 들어 선생은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산하 학생회 특별찬성원으로 선임돼 학생들의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부회장 겸 임시사법, 공립협회 본부인 공립관 사무, 공립신보사 사무까지 맡아 공립협회가 독립운동단체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1906년 6월 상항대진재(桑港大震災) 당시 일본 영사를 통한 고종의 구휼금 분급 문제와 관련해 선생 등 공립협회 임원진은 일본영사의 간섭행위에 대해 통고문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일본영사로부터 한인 사회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사건으로 공립협회는 미국의 묵인 하에 미국 내 한인 자치기관과 대표적 외교기관으로 자리잡았다.

◇대한신민회 창립···국내의 신민회 결성과 매국노 처단 지원

1907년 1월 공립협회는 ‘통일연합론’에 근거해 ‘통일연합기관’을 설치하고자 했다. 통일연합론은 당시 한인 단체가 국내와 해외에 산재돼 있었기에 공립협회 중심으로 국내외 각 지역에 공립협회 지회에 해당하는 연합기관을 설치하고 이를 통일해 국권 회복과 ‘공화정체의 독립국’을 건설하려는 운동이다. 통일연합론은 독립전쟁을 수행할 거점이 한국이라는 점을 중시해 국내와 상호 연계를 맺어 독립전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7년 1월 안창호, 이강, 임준기, 신달윤, 박영순, 이재수 등은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신민회’를 만들었다. 당시 대한신민회에서 가주(加州, 캘리포니아주)감독장에 안창호, 한국감독장에 양기탁, 임치정, 이동휘, 이갑 등이 선정됐다. 임치정 선생이 국내에서 활동할 핵심 인사였음을 보여준다.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에 밀사 파견을 계기로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 당했다. 이어 정미조약 강제 체결, 구한국군 강제해산 등으로 국내에서 의병전쟁이 일어났다. 의병전쟁 직후 선생 등 공립협회 임원진은 정미의병전쟁을 ‘독립전쟁’의 최적기로 판단했다. 이에 공립협회 중견 위치의 인물들을 잇따라 파견해 신민회 결성과 매국노 처단을 적극 지원했다.

선생은 1907년 겨울 국내로 들어와 ‘대한매일신보사’ 부총무 겸 회계주임으로 일했다. 선생이 대한매일신보사에 근무한 것은 양기탁과 친분을 쌓아 신민회 조직 결성을 권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은 이강과 함께 안창호를 도와 양기탁에게 신민회 가입을 권유했다. 이에 선생은 전덕기, 이동녕, 조성환, 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세웠다. 신민회가 창립 후 선생은 1908년 1월 서우학회에 가입하고 그 해 3월에는 서북학회에 가입했다.

◇나라 팔은 이완용을 처단하라

1908년 이후 의병전쟁이 쇠퇴하면서 공립협회는 현실적인 힘의 열세를 체감했다. 공립협회는 전면적인 독립전쟁론에서 독립군기지 개척으로 전략을 바꿨다.

이에 국내에서 신민회 활동에 주력하던 임치정 선생은 안창호, 이교담, 김성무 및 신민회 회원들과 접촉하며 독립군기지와 관련해 논의했다.

1909년 11월 동아찬영회와 대한상무조합 등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모회 및 송덕비 건립문제를 제기하자 선생과 양기탁은 이를 맹렬히 비난했다.

또 선생은 1909년 안창호, 이승훈, 안태국 등과 함께 이재명의 매국적 행위와 매국노 처단을 적극 지원하고 계획했다. 미국 공립협회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이재명 등 권장회 회원들과 함께 이완용 등 매국노 처단을 준비했다.

이재명 등 권장회 회원들은 1909년 12월 23일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명동 천주교당에서 나오는 이완용을 처단하려 했으나 일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이재명은 사형에 처해졌고 임치정 선생은 이교담, 안태국, 송종원 등 신민회원 13명과 함께 불기소 됐다.

◇일제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수감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선생은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옥관빈 등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해외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독립군기지 창설을 위한 서간도 이주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신민회 간부회의는 모두 4차에 걸쳐 열렸다. 선생은 네 차례 모두 전국 간부로서 참여했다. 이 가운데 세 차례는 선생의 집에서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만주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개척 움직임을 눈치 채고 선생과 양기탁 등을 체포했다. 선생은 1911년 7월 22일 보안법위반으로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년 후인 1912년 9월 27일 대사령(大赦令)으로 감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일제는 평안도 일대의 독립운동가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1910년 11월 압록강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 모의 혐의를 조작했다. 일제는 1911년 9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사건(105인사건)’을 조작해 선생 등 105인의 독립운동가들을 감옥에 가뒀다.

재판에 회부된 선생은 1911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유동열 등 6명과 함께 보안법위반과 총독모살미수죄로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받았다.

선생과 신민회원들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1912년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제1회 공판이 개정된 이래 1913년 2월 5일까지 총 51회에 걸쳐 공판이 진행됐다.

일제는 1913년 3월 20일 99명에 대해 무죄를 판결하고 사건이 허위 날조된 것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선생 등 신민회 최고 간부 6명에게는 징역 6년을 판결했다. 선생은 4년여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1919년 진남포의 독립만세운동 주도

출감 후 선생은 1919년 2월 중순 이승훈의 지시에 따라 대규모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선생의 계획에 따라 노윤길 등은 평양의 이승훈과 접촉하면서 거사 준비를 진행하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선생은 신민회 활동을 통해 진남포의 3·1운동을 주도했다.

3·1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1919년 7월 10일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연통제’ 실시를 공포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와 국내 간의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보와 통신, 군자금 모집을 위해 조직된 제도였다.

임치정 선생은 1920년 1월 12일 평남 독판 이덕환 산하에 진남포 참사로 임명돼 활동했다. 그러나 1920년 5월 평북 독판 안병찬이 일제에 붙잡히고 7월 의주군 통신원 양승업 등 22명이 체포돼 평안도의 모든 조직이 붕괴됐다. 선생도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선생은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그 노력이 번번히 좌절됐으나 항상 자신을 낮추고 남을 도왔다.

임치정 선생은 1932년 1월 9일 서대문 자택에서 뇌일혈로 눈을 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춘곡(春谷)은 의리와 우정과 불평의 사람이었소. 그가 한 번 허락한 동지에 대한 의리는 일즉 변해보는 일이 없었소. 또 춘곡은 친구에 대하여는 항상 춘풍과 같은 우정을 가졌고 빈궁한 동지의 가족은 자기 가족과 같이 여겨서 의식을 같이하였소. 항상 불평이 있어 술로 잊으려 하였소.” (1932년 임치정 선생에 대한 지인의 추모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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