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 경제 의식 일깨워···일자리 없는 여성들 위해 속옷 공장 설립 기획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조신성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조신성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조신성(趙信聖) 선생은 여자의 몸으로 항일무장투쟁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헌신했다. 맹산독립단을 만들어 이러한 일을 수행했다. 선생은 가슴에 다이너마이트, 탄환 등을 품고 며칠씩 굶기도 했고 순검과 격투를 했다. 선생은 교육활동과 여성들의 권리 향상에도 힘썼다. 근우회를 통해 여성들의 경제 의식을 일깨우고 직업을 가지도록 노력했다.

선생은 1873년 평안북도 비현역 근처에서 태어났다. 삶은 쉽지 않았다. 선생이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9세 되던 해 어머니마저 독사에 물려 세상을 떠났다. 16세에 결혼을 했으나 6년 만에 남편이 가산을 탕진한 후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이후 선생은 1897년 평북 의주읍 교회에서 기독교 신자가 됐다. 당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여성들 가운데 과부들이 많았다. 차별대우를 받던 과부들에게 기독교는 우호적으로 대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은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를 가진 귀중한 존재로 여기게 됐고 자신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했다”며 “이러한 자각은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깊은 인식을 하게 했으며 나아가 민족과 여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고 밝혔다.

여성 교육 활동에 힘 쓰다

선생은 24세에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과 상동 소재 교원양성소를 졸업했다. 이 후 같은 지역의 소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28세부터 6년 동안 이화학당 사감으로 일했다.

선생은 이준과 함께 한국 최초의 조선부인회를 만들었다. 이 활동을 하면서 선생은 많은 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들과 만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안창호다.

이 후 선생은 34세에 일본 유학을 갔다. 귀국 후 평양으로 가서 평양 진명여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평양 진명여학교는 여성 교육을 위해 도산 안창호의 주도로 설립됐다. 그러나 국권을 상실함으로써 도산의 해외 망명과 경제적 지원을 담당하던 평양부인회 회원들의 탈퇴로 폐교 위기에 처했다.

이 상황에서 조신성 선생이 진명여학교를 책임지게 됐다. 선생은 각고의 노력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다시 번창시켰다. 진명여학교 설립 6년 만에 학생이 100여명에 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선생은 비밀 임무를 위해 북경으로 떠났다. 선생이 북경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국가보훈처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고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맹산독립단 만들어 독립운동 자금 모으다

선생은 북경을 다녀온 후 1919년 11월 만주 관전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맹산독립단을 만들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항일무장투쟁과 군자금 모집이 맹산독립단의 주요 활동이었다. 구성원은 19명이었다.

1934년 ‘신가정’의 한 기자가 선생에게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물었다.

이에 조신성 선생은 “가슴에다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시시로 변장을 해가며 깊은 산 속을 며칠씩 헤매고 생식을 해가면서 고생을 했다. 주막에서 순검에게 잡혀 가지고는 격투하거나, 오도가도 못하고 끼니를 굶어가며 산속에서 며칠씩 숨어 있었다”고 답했다.

독립단 활동 중 선생은 일제 경찰에게 체포돼 평양지방법원에서 6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 선생은 다시 교육 운동에 매진했다. 평원군 한천에서 사숙을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대동군 대평에서 취명학교를 운영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근우회 통해 여성 경제 의식 향상 노력

선생은 1927년 사회주의 여성운동세력과 민족주의 운동세력이 힘을 합쳐 근우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여성단체운동을 시작했다.

선생은 근우회 평양지회에서 활동했다. 근우회 평양지회는 박현숙, 박승일, 김선경, 김경옥, 백덕수 등에 의해 1928년 1월 30일 만들어졌다.

근우회 평양지회는 근우회 회관을 만들고 여성들에게 경제 의식을 일깨웠다. 일자리가 없는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도록 속옷 공장 설립을 기획하기도 했다. 추상적 여성 운동이 아닌 현실적인 여성 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한 것이다.

1930년경 근우회 본부가 해체된 후에도 선생은 평양지회를 중심으로 계속 활동했다. 근우회 야학운동 활동에 힘썼고 본인이 예전부터 운영하던 취명학교도 운영했다.

선생은 1932년 6월 25일 무산 아동을 위한 학교인 고육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선생은 1945년 해방이 되자 3개월 만에 월남했다. 북한 지역에서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한 후 활동이 어려워져 남한을 선택한 것이다. 1948년에는 대한부인회 부총재로 활동했다.

선생은 1953년 5월 5일 부산의 신망애 양로원에서 생을 마쳤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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