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한인 보호에 힘 써···대한독립신문 간행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이미지=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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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춘선(具春先) 선생은 1919년 용정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난 후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했다. 조선독립기성총회와 대한국민회의 회장을 맡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대한국민회 지회들을 간도에 72개소 설치하고 군자금과 무기를 모았다.

구 선생은 1857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886년 하급 군졸로서 온성군 영달진에서 근무했다. 선생은 뛰어난 학식과 인품, 체력으로 서울의 궁궐을 수비하는 군인이 됐다.

선생은 남대문 수문장 등 중앙군의 일원으로 일하다가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후인 1895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897년 북간도로 갔다.

◇ 중국에서 한인 보호하다···대한독립신문 간행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만들어 한인 보호에 나서자 구 선생은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해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를 보호했다.

1905년 이범윤이 노령으로 망명한 후 한인보호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구 선생은 용정촌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1907년 캐나다 선교사 구예선(R.Grierson)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했다.

선생은 같은 해 용정시교회, 1913년 하마탕 교회 설립을 지원했다. 1913년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김약연·백옥보 등이 한인 자치기구를 조직하자 이 기구의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3월 13일 길림성 용정에서도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에 대한 축하식을 했다.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 본부를 두고 있던 조선독립의사회에서 주관한 이 만세운동은 3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참가했다.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인사들도 대부분 참석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보다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하고자 했다. 이에 조선독립의사회를 조선독립기성총회로 개편했다. 구 선생은 이 단체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3.1운동 직후 이익찬·윤희준·방달성 등과 함께 용정에서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했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된 후 조선독립기성총회는 명칭을 ‘대한국민회’로 바꿨다. 선생은 여기의 회장으로 선출됐다.

대한국민회는 노령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활동했다. 선생은 노령 지역과 연계투쟁을 위해 노령을 다녀왔다. 선생은 유예균과 함께 1919년 8월 23일 군정사후원회를 만들었다.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 군무부의 왕청현(汪淸縣) 교통부 책임자로 활동했다.

◇ 국권회복 위해 군자금과 무기 모으다

구춘선 선생은 1919년 12월 20일경 연길현 춘양향(春陽鄕) 하마탕에서 동지 20여명과 비밀 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간도에 국민회 지회 72개소를 설치하고 각 지회에 30명 이상의 간부를 두고 군자금을 대대적으로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2월에는 노령 방면으로부터 군총을 입수해 독립군의 전투력을 높였다.

1920년 10월 29일 간도에 있는 간북대한의민회,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대한국민회 등이 하나로 합쳐 임시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총판부를 결성했다. 이 때 선생은 연길·화룡·돈화·액목 등을 담당하는 간북(間北) 남부총판부 총판으로서 부총판인 방우룡 등과 활동했다.

구 선생은 1921년 12월 돈화현 양수천자(凉水泉子)에서 총판부를 만들어 사관학교 설립과 국내에 진공해 일제 경찰 암살 계획을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21년 12월에는 자유시사변의 책임과 관련해 대한국민의회 문창범과 함께 고려혁명군정의회를 비판하는 성토문을 발표했다.

◇ 대한국민회 재건에 힘쓰다

구 선생은 1926년 하마탕을 거쳐 왕청현 백초구(百草溝)로 돌아왔다. 그 후 항일 무장운동에서 종교운동, 교육운동으로 방식을 바꿨다.

1927년에는 국민회 동지들과 북간도 대한국민회 재건 운동을 했다. 1928년 11월에는 돈화현에 있는 마진에게 대한국민당 조직을 명했다. 1934년에는 한국교회 희년(禧年)을 맞아 문재린 등과 함께 동만주 기독교 세력의 지하조직을 구축하기도 했다.

구 선생은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3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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