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리”···산남의진 의병 일으켜 서울수복작전 중 둘 다 순국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이미지=조현경, 이다인 디자이너
/ 이미지=조현경, 이다인 디자이너

아버지 정환직과 아들 정용기는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에 목숨을 바쳤다. 이들 부자는 의병을 모집하고 서울로 진격해 황제를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아들 정용기는 1907년 입암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순절했다. 이에 아버지 정환직이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를 타격했다. 정환직은 일본군 수비대에 잡혀 회유를 받았으나 끝까지 항일 의지를 지키고 총살형을 당했다.

정환직(鄭煥直)은 1843년 경상북도 영천군 자양면 검단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동엄(東广)이었다. 정환직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해 영천성을 탈환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다.

정환직은 12세인 1855년 향시(鄕試)에서 장원(壯元)을 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 상 의술을 연마해 각처를 돌아다녔다. 정환직은 44세인 1887년(고종 24) 형조판서 정낙용(鄭洛鎔)의 추천으로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가 되었다. 당시 전의는 임금의 질병과 황실의 의무(醫務)를 관장하던 의관이었다.

당시 정환직은 논설 ‘무우성기(無憂城記)’에서 돈의 폐단을 지적했다. ‘출교외문야인(出郊外聞野人)’에서는 매관매직과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며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했다.

정환직은 1888년(고종 25) 충무위사용행의금부도사 겸 중추원의관으로 벼슬에 올랐다. 1894년 2월 동학농민이 봉기하자 삼남지방에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으로 파견돼 토벌작전에 참여했다. 이어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완전사(翫戰使)로 당시 군무대신 조희연(趙羲淵)과 동행해 청·일 양군의 전투를 지켜봤다.

당시 국내 상황은 위태로웠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조선정책을 강화하고 내각재편과 내정개혁을 급격히 진행했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이후 종래의 ‘척양척왜(斥洋斥倭)’에서 ‘항일구국(抗日救國)’을 표방하고 전국적으로 일어나 항일전을 시작했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황해도 일대의 동학농민군 토벌에 일본군이 개입해 토벌하도록 허락했다.

이 때 정환직은 ‘일병의뢰반대상소(日兵依賴反對上疏)’를 올려 동학군 토벌을 일본군에 의뢰하는 것을 반대했다.

정환직은 10월 선유사겸토포사(宣諭使兼討捕使)로 황해도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됐다. 정환직은 구월산 일대의 농민군을 진압했다.

정환직은 1898년 ‘토역상소’를 올려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역신들을 소환 처벌하고 국모시해를 응징하도록 촉구했다. 정환직은 1905년 12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이 비밀리에 내린 조서를 받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 고종을 뜻 받들어 아들 정용기와 의병 일으키다

이에 정환직은 1905년 관직을 사퇴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큰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거의(擧義)의 뜻을 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정용기가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결의함으로써 부자는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정환직 부자는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모아 의병을 일으키려고 계획했다. 이때 정환직 부자는 서울진공을 위한 북상 계획을 실현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강원도를 거쳐 서울에서 합류해 황궁을 옹호하며 일제를 쳐부수기로 했다.

정환직 부자가 계획한 서울진공작전은 당시 서울에서 구국운동을 하던 허위·이강년·여중룡 등이 1906년 5월 5일 구상했던 서울진공작전의 초기 단계이기도 했다.

정환직은 1906년 1월 아들 정용기를 영남으로 보내고 자신은 영남 일대를 돌며 동지를 모았다. 정환직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군자금으로 고종의 하사금 5만냥과 전 참찬 허위로부터 받은 퇴직 동료들의 모금 2만냥을 확보했다.

정환직은 퇴직 동료들과 군략상 급무를 논의하며 군인들을 모아 시기를 기다리도록 했다. 의병 활동에 필요한 무기와 군수품은 외국인을 통해 구입하기로 했다. 정환직은 청나라 사람 왕심정(王心正)을 통해 양식총 500병(柄)과 기타 군수품을 구입하기로 했다.

이렇게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했다. 산남의진은 영천을 중심으로 한 의병 부대다.

정환직은 서울진공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서울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정환직의 순절과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최세윤 대장이 지휘하는 산남의진의 서울진공작전도 지대별 유격전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산남의진의 서울진공을 위한 북상계획은 의병 활동 초기부터 꾸준히 추진된 작전이었다.

◇ 정용기, 항일 무장 투쟁 이끌며 전투 중 순국

정용기의 의병 활동은 아버지 정환직의 후원과 협력이 있었지만 그 자신도 아버지와 같이 당시의 위태로운 상황을 인식하고 국권회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졌다.

정용기는 1905년 을사늑약 시기 상황이 날로 잘못돼 가고 있음에 분개해 황실보존, 민생 보호 등의 내용을 의정부에 건의했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행위를 탄핵하는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을 발표했다.

정용기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아버지 정환직이 고종의 뜻을 받아 함께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1906년 3월 정용기는 대장으로 추대됐다. 진호(陣號)를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하고 부서와 조직을 편성했다.

산남의진은 창의 초기부터 목표가 서울진공이었다. 정용기는 각처에 주둔하고 있던 산남의진의 지역부대를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모이도록 연락한 후 3월 5일 행진을 시작해 영천·청송지방을 경유해 북상했다.

이 과정에서 정용기 대장은 신돌석의병진(申乭石義兵陣)이 영해에서 토벌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영해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1906년 4월 28일 경주 우각(牛角)을 지나다가 일제에 체포돼 대구의 경상감영에 붙잡혔다. 정용기는 아버지 정환직의 주선으로 9월 대구경무청에서 석방됐다.

정용기가 돌아오면서 산남의진도 1907년 의병투쟁을 재개했다.

우선 산남의진은 관동으로 진출하기 위해 신돌석부대를 지원하고 동해안 쪽으로 척후병을 파견하면서 북상의 길을 찾았다. 영해·청하·청송·포항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북상은 늦어졌다.

정용기는 1907년 9월 초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해 8월 29일 본진 선발대 100여 명을 거느리고 죽장의 매현(梅峴)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이튿날 일본군이 입암(立巖)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산남의진은 9월 1일 새벽 입암을 공격하기로 하고 매복을 했다.

그러나 산남의진은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참모장 손영각(孫永珏)·좌영장 권규섭(權奎燮) 등 수십 명의 장령들이 목숨을 잃었다.

입암전투(立巖戰鬪)의 패배로 산남의진의 지휘부가 무너지고 서울진공작전도 미뤄졌다.

◇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입암전투에서 패한 1907년 9월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각오로 군사를 모집하고 진영을 재편성했다.

산남의진은 같은해 9월 3일부터 9월 12일 사이에 보현산(普賢山) 주위 인근지대에 흩어진 군사를 집결하고, 여러 장령과 종사들을 각지로 보내 군사를 모으고 적세를 살폈다.

9월 12일 밤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진을 옮기고 청하·영덕·청송 등지에서 군량을 모았다. 울산분견대(蔚山分遣隊) 병사 출신의 우재룡(禹在龍)·김성일(金聖一)·김치현(金致鉉) 등은 군사를 훈련시켰다.

북동대산에 진을 친 산남의진은 9월 22일 흥해(興海), 9월 28일 신녕(新寧), 9월 29일 의흥(義興) 등지를 공격해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10월 2일 청송 두방(斗坊)에 진을 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급습을 받았다. 10월 5일 산남의진은 추격하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보현산에 모였다. 진영을 2대로 편성해 일대는 청송, 일대는 기계로 이동했다. 10월 11일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흥해분파소(興海分派所)를 습격한 후 청하·영덕·북동대산 등지에서 활동했다.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청송의 보현산 일대와 영일의 동대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의병 토벌을 위해 증원된 일본군은 안강·기계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전을 가해왔다.

이에 의병진의 탄약과 장비의 소진이 컸다. 애초 산남의진이 서울진공작전의 일환으로 계획하고 추진했던 관동지방으로의 북상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정환직은 관동 진출을 위한 최후의 방책으로 진용을 분산해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정환직은 “내가 먼저 관동(關東)으로 들어가 중인(衆人)을 기다릴 것이니 중인은 각지로 나아가 탄약 등을 구하여 관동으로 들어오라”며 병사들을 상인·농부 등으로 변장시켜 모두 파견했다.

그러나 산남의진이 관동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정환직은 11월 6일 청하면 각전(角田)에서 일본군에 붙잡혔다.

정환직은 일본군에게 귀순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끝내 거부했다. 결국 1907년 11월 16일 남쪽 교외(郊外)에서 총살당했다. 정환직은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身亡心不變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리)

義重死猶輕 (의리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

後事憑誰託 (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할꼬)

無言坐五更 (말없이 앉아 오경을 넘기노라)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