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는 자신만의 분명한 삶의 리듬을 갖고 산다. 주변에서 그에게 붙여준 애칭은 ‘쓸모인류’ 혹은 ‘가회동 집사’. 빈센트는 자신이 사는 동네를 자주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린다. 나이 차나 직업 불문, 좋은 이웃들을 만들었다. 빈센트에겐 ‘오래 갈 동네 친구들’이 많다.

둘은 좋은 이웃이자 ‘공생 관계’다. 빈센트는 적절한 소비자이고, 빵집 주인은 정직한 생산자다./사진=이지아

 

요즘 딸은 어린이집에서 주 1회 발레 수업을 듣는다. 집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때는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고 발가락으로 사뿐사뿐 걷는다. 처음 배우는 발레가 재밌어 서? 발가락으로 걷는 게 체형 관리에 도움이 되니까? 모두 아니다. 딸이 집에서 쿵쾅쿵쾅 뛸 때면, 부모는 소리를 지른다. “발레 하듯 걸어!!”(가능한 한 쥐 죽은 듯 걸으란 주문). 이 말은 ‘집 안에서 걷는 법’에 대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파트 13 층에 사는 사람이 12층 사는 사람으로부터 ‘층간소음’ 항의를 받은 뒤 시작된, 집안에서 걷는 법’과 관련된 지시사항이다. 나 역시 그 지시사항에서 예외가 아니다. 늦은 밤 두 발로 쿵쿵거리면, 딸이 달려와 몸소 시범을 보여준다, “아빠, 이렇게 발뒤꿈치 들고 발레 할 때처럼 걸어.” 아, 그렇게 나도 층간소음 탓에 발레를 배운다.

층간소음 문제로 항의를 받은 뒤로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함께 탄 사람의 눈치를 본다. 혹시나 12층을 누르는 아래층의 ‘그분’을 만나면 조심스레 인사를 나누고, “요즘은 발레 하듯 걷고 사니 소음이 덜하시죠?”라는 안부를 물어야 할까? 아직은 아래층 사람의 얼굴을 모른다. 경비실을 통해 항의 전화를 받아서 그렇다. 아파트에 산다는 건, 상하(위층과 아래층 사이)와 좌우(옆 호에 사는 분들은 신혼으로 보이는데, 서로 수줍게 눈인사만 나누는 사이) 관계에서 층수를 구분 짓는 콘크리트 바닥만큼의 조심성과 경계를 안고 살아야 하는 삶이다. 한편으로 내 천성이 굳이 사람들과 엮이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 새로 이사 왔다고 이사 떡 돌리는 시대는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웃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에 어색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자발적으로 ‘이웃과 친해지기’를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빈센트는 가회동 한옥집에 이사 오면서 이웃들에게 떡(아니면 직접 만든 빵 종류 인지 정확지는 않다)을 돌렸다. 그 덕에 바로 윗집에 사는 일본인 직장인(한국 지사에 파견 나온), 옆에 있는 성당의 수녀님들과 꽤 친하게 지낸다. 이웃과 친해지면서 얻는 관계의 장점들이 있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일본인 이웃의 주차장을 빌려 차를 댈 수 있고, 수녀님들과 사는 얘기를 나누니 심심하지 않다. 빈센트 식 관계의 적극성은 동네에 여러 단골을 만들었다. 캐주얼한 프랑스 음식점의 젊은 요리사와 친구처럼 지내고, 파스타 가게에 들르면 단골이란 이름으로 별도의 서비스 메뉴를 제공받기도 한다. 동네 골목길을 활기차게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빵집이 있다. 빵집 이름은 베이커利. 빵을 뜻하는 영어 ‘베이커리’의 마지막 글자를 이로울 리(利)로 바꾼 가게명이다. 사람 몸에 좋은 빵을 만들겠다는 각오랄까, 주인장의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읽힌다. 동네에 문을 연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다. 오픈을 준비하는 모습이 골목길을 산책하던 빈센트의 눈에 띄었다. 빈센트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영어 이름이 뭐예요?”

“없는데요. 세례명이 마테오이긴 합니다만.”

“그래요? 그럼 마테오의 미국식 이름인 매튜라고 부르면 어때요?

난 이 동네 사는 빈센트입니다.”

1.2이곳엔 멋 부린 빵이 드물다. 식빵, 캉파뉴, 사워도우가 메인이다. /사진=이지아
1.2이곳엔 멋 부린 빵이 드물다. 식빵, 캉파뉴, 사워도우가 메인이다. /사진=이지아

 

빈센트는 빵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고 했다. 반죽에 쓰이는 밀가루는 어떤 건지, 요즘 빵집들은 빵 무게가 너무 가벼워 맘에 안 든다고, 또 어떤 빵은 자기가 더 쉽게 잘만들 수 있다는 여러 말들을 덥석 내뱉었다. 토목건축을 전공한 빈센트는 오픈 준비 중인 빵집 인테리어를 두고 이것저것 조언까지 했다. 빈센트와 빵집 주인이 서로를 전혀 모를 때였다. 서로가 친해질 수 있을까,라는 것도 의심할 때였다. 빵집 주인은 빈센트를 참견 잘하는, 조금 이상한(?) 동네 어른으로 생각했다.

빈센트는 자주 빵집에 들렀고, 필요한 빵을 샀다. 한 사람은 적절한 소비자고, 한 사람은 정직한 생산자였다. 이제 빈센트는 빵집의 단골이 됐다. 시장 가치로 따지면, 빈센트와 빵집 주인은 ‘공생관계’다. 한 사람은 정직한 물건을 만들고, 한 사람은 기꺼이 그 물건에 값을 지불한다. 그런데 알다시피, 인간관계가 모두 이렇게 긍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이 새로 사람을 사귀기 전에 적당한 경계심을 갖는 이유는, 모든 관계가 긍정적일 수 없다는 불안 탓일지 모른다.

가능하면 좋은 재료를 고른다. 천연 발효를 하려면 노동의 시간이 배로 든다. 속(?) 깊은 빵의 탄생기를 듣다가, 문득 인간관계를 생각했다. “빵이든 사람이든 뭐든, 결국 진심이 담겨야 돼.” /사진=이지아

 

“물론, 나도 사람 만날 때 경계를 하지. 이웃을 만들기 전에 나와 좋은 친구가 될 수있는지 알아보는 과정이 필요해. 어떤 재료를 쓰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내가 필요한 질문을 던졌고 그 대답을 들었어. 빵집 주인의 눈빛과 태도가 좋았어. 이 빵집은 건강하고 거품 없는 빵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곳이야. 난 이 빵집에서 장사나 사람 관계에서, 오래 갈 성격을 봤어. 그렇다면 이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생각했지. 친구란 게 뭐야? 서로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사회적 환경을 키워가는 관계잖아. 나도 관계에 예민해. 다시 잘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건 불편하 니까. 좋은 이웃들과 오래 가고 싶을 뿐이야.”

베이커利(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121)라는 작은 빵집 주인은 커피를 좋아했다. 새벽에 나와 빵을 굽고 나면 직접 커피 그라인더에 커피를 내려 혼자 마시는 시간을 즐긴다. 드립커피는 노동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다. 손님을 상대로 커피를 팔지는 않는다. 가끔 여유로운 시간에 빵집에 들른 단골에게는 커피를 내어준다. “어떻게 이로운 빵집이란 정직한(투박한) 이름을 지었어요?”

단골 가게 한편에 놓인 원재료. 정직한 장사를 하는 곳은 대개 쓰는 재료가 모습을 감추지 않고 드러나 있다./ 사진=이지아
단골 가게 한편에 놓인 원재료. 정직한 장사를 하는 곳은 대개 쓰는 재료가 모습을 감추지 않고 드러나 있다./ 사진=이지아

머리를 빡빡 민 빵집 주인이 웃으며 답을 했다. “그냥 다른 빵들보다는 사람 몸에 좋은 빵을 만들고 싶었어요. 화학조미료나 이스트 같은 걸 안 쓰는 천연 발효 빵을 만들고 싶었죠. 그러면 16시간 이상은 발효를 해야 하니까 훨씬 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으니까요.” 이 빵집에선 멋 부린 빵이 드물다. 캉파뉴(시골 빵), 사워 도우(sour dough, 기본적인 천연 발효 빵의 한 종류)가 이 작은 빵집의 시그니처 메뉴다. 빈센트가 이것저것 골라준 빵 한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을 발레 동작으로 걸으며 ‘층간소음’을 생각했다. ‘오늘 가져온 빵 한 봉지를 12층 그분들께 건네며 안면을 터볼까? 이웃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시작해볼까?’ 그마저 어색 해서 나는 빵 봉지를 건네지 못했고, 층간소음이 걱정될 때면 여전히 발뒤꿈치를 들고 발레를 하듯 걸어 다닌다. 이웃과 친해지기 혹은 ‘공생’의 관계란 어쩌면 이리 가까운 듯 먼지. 빵 한 조각을 입안에 넣으면서, 콘크리트 바닥만큼의 간격을 쉽게 허물지 못하는 ‘사람 사이’를 생각했다.

 

리빙센스 2019년 8월호

https://www.smlounge.co.kr/living

기획 정미경 기자 강승민(프리랜서) 사진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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