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리석 외아들 차영조씨 “이영훈은 큰아버지의 외증손자···직계 아냐”
“아버지 명예에 전혀 도움 안 돼···산소도 한번 안 찾아”

이영훈 교수가 지난 6일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비판하며 올린 동영상 중 일부. 자신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며 차리석 선생이 외증조부라고 말하고 있다. / 사진=유투브 채널 '이승만TV' 캡쳐
이영훈 명예교수가 지난 6일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비판하며 올린 동영상 중 일부. 자신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며 차리석 선생이 외증조부라고 말하고 있다. / 사진=유투브 채널 '이승만TV' 캡쳐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1881~1945)이 자신의 외증조부라는 이영훈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부역·매국·친일파’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지적하자 자신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며 한 발언인데, 거짓말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지난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명예교수 등이 펴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에 대해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했다. 조 전 수석은 일제 식민 지배 기간에 위안부 성노예 등이 없었다는 이 명예교수 주장 등을 언급하며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학자, 이에 동조하는 일부 정치인과 기자를 ‘부역·매국·친일파’라는 호칭 외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에 이 명예교수는 지난 6일 유튜브 채널 이승만TV에서 ‘조국 교수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통해 “평생 비정치적으로 연구실을 지켜온 사람을 두고 ‘부역·매국·친일파’라고 매도했다”며 “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내무장관으로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를 사실상 끝까지 지켜온 차리석 선생은 저의 외증조부가 된다”라고 했다. 또 “저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자라왔다”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차리석 선생이 외증조부라는 이 명예교수의 발언은 시사저널e 취재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차리석 선생의 외아들인 차영조 선생에 따르면 이 명예교수는 차리석 선생의 직계 후손이 아닌 선생의 큰형인 원석씨의 외증손자다. 원석씨는 아들이 없었고, 그의 딸의 딸의 아들이 이 명예교수라는 게 차영조 선생의 설명이다. ‘외증조부’가 아니라 ‘외외증종조부’가 되는 것이다.

차영조 선생은 “큰아버지의 둘째 딸과 30년 전에 만나 교류하고 있다. 그분에게 확인했더니 이 명예교수는 내 큰아버지의 외증손자일 뿐이다. 큰 아버지 딸의 딸의 아들이다. 차리석 선생의 외증손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름을 팔 게 따로 있다. 아버지의 명예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처음엔 황당해서 껄껄 웃었다. 감정적으로 화도 나지만 사과를 요구한다고 해서 사과할 것 같지도 않다”라고 했다.

차영조 선생은 또 “이 명예교수가 집안 어른인 차리석 선생을 언급하려면 최소한 산소에는 한번이라도 찾아왔어야 하는 게 아니냐”면서 “차리석 선생의 묘지는 지방도 아니고 효창공원에 있다. 이 명예교수가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다”라고 지적했다.

광복회 고문 변호사인 정철승 변호사는 “거짓말을 처벌하는 법 조항은 없다”면서도 “이 명예교수의 거짓말은 사회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또 “이 명예교수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우리나라가 근대화되고 개화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쓸데없는 짓을 했다거나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다라는 주장을 한 것과 다름 없는데 그런 이야기(차리석 선생이 외증조부다)를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꼬집었다.

시사저널e는 이 명예교수의 반박을 듣기위해 그가 교장으로 있는 이승만 학당에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이 명예교수는 지난 4일에도 친일에 대한 입장을 묻는 언론사 기자의 얼굴을 가격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한편 차리석 선생은 1908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에 부임해 후학양성에 힘쓰셨다. 1911년 초대총독인 데라우치총독 암살 모의사건인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투옥돼 3년을 복역했다. 3·1운동 이후 1919년 상해로 망명해 독립당 간부로 활동했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국장을,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비서장에 선출됐다. 1945년 광복 소식을 듣고 환국 준비중 과로로 쓰러져 숨졌다. 1962년 독립장이 서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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