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중재 역에 관심 없다" 밝혀···한·일 경제 갈등 길어질 가능성

아베 신조 일본 정권이 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 국가, 이른바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을 각의서 통과시키면서 수출규제에 따른 후폭풍이 커지고 있다. / 그래픽=조현경 디자이너
아베 신조 일본 정권이 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 국가, 이른바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을 각의서 통과시키면서 수출규제에 따른 후폭풍이 커지고 있다. / 그래픽=조현경 디자이너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가 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가, 이른바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을 각의에서 통과시킨 후 수출규제에 따른 후폭풍이 커지고 있다. 당초 화이트리스트를 유예 또는 보류하는 방안을 미국 측이 설득할 것을 기대했지만 미국은 중재에 나서는 대신 ‘관여’하겠다고 밝혔고, 그에 따라 대화 중재 노력을 하더라도 사태가 장기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본 교도통신은 지난 2일 일본 정부가 각료회의에서 한국을 백색국가 명단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했다고 보도했다. 화이트리스트는 일본이 첨단 소재 및 전자 부품 등을 수출할 때 심사에서 우대하는 안보 우방 국가로서, 지정되면 3년간 개별 수출허가 신청이 면제된다. 수출심사 우대가 사라지면 전자·철강·화학·자동차 등 1100여 개의 한국 수출 물품이 포괄허가에서 개별허가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중재’ 대신 ‘관여’ 하겠다는 美···장기전 가시화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 조치로 한·일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 가운데, 미국이 대화 중재 노력을 하더라도 사태의 장기화는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당초 우리 정부는 미국이 나서서 화이트리스트 제외 방침을 유예 또는 보류하게 만들 것을 기대했으나, 미국 측이 중재나 조정에 관심이 없다는 의지를 밝혀 한·일 관계에서 돌파구 찾기는 난항을 겪을 것으로 관측된다.

태국 방콕에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지난 2일(현지 시각)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 종료 후 미국 고위당국자는 기자들과 만나 “3국이 만났다는 사실은 해법을 찾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라면서도 “미국은 중재나 조정에는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미국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에 대해 우려하고 있지만 한·일 갈등과 관련해 직접적이거나 적극적인 중재, 조정에는 나서고 있지 않다고 읽히는 대목이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점차 심화된 한·일 간 갈등 국면에서 어느 한 쪽에도 서지 않는 모양새를 취해 왔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지난 1일(현지 시각) 방콕에서 열린 태국 외교장관과의 양자회담 후 “한국과 일본 양국이 갈등을 완화할 방법을 찾길 바란다”며 직접적인 중재나 조정 역할과는 거리를 두는 자세를 취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한·미·일 외무장관 회담에서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구체적인 중재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미국도 중재 역할에 나서지 않으면서 한·일 갈등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일본은 추가적인 상황 악화 조치를 동결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일정 기간 한·일 양측이 외교적 합의 도출을 위해 노력할 것을 제안한 이른바 ‘스탠드 스틸’(standstill agreement)로 불리는 미국 측의 현상 동결 합의 제안도 사실상 거부했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경제보복 사이에서 한·일 간 입장차가 크고, ARF 계기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양국의 간극이 첨예한 것을 확인한 상황에서 미국이 앞으로 추가적인 중재안을 내놓기는 힘들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도 한·일 양국의 입장이 견고한 상황에서 중재안을 내놓는다 해도 외교적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 2일 오후(현지시간)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외교장관 회담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기념촬영 후 강 장관과 고노 외무상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 2일 오후(현지시간)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외교장관 회담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기념촬영 후 강 장관과 고노 외무상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 美, ‘호르무즈 호위 참여’ 촉구···한·일 갈등 국면 전환되나

이런 가운데 폼페이오 장관은 5일 호르무즈 해협 안전을 위한 미국 측의 ‘호위 연합체’ 구상과 관련해 각국의 동참을 촉구하면서 한국과 일본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목된다.

호주를 방문 중인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마크 에스퍼 국방부 장관과 함께 호주 측 인사들과 장관급 회의(AUSMIN)를 가진 후 기자회견에서 “자국의 경제에 중요한 물품들이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으므로 해협 내 억지력이 그들의 시민과 나라에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며 “역내 충돌 위험을 감소시키고 항행의 자유를 가능하게 할 국제적 연합을 구축하게 될 것이란 점을 매우 확신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일본·한국처럼 이 지역(호르무즈 해협 인근) 내 이해관계가 있고 물품과 서비스, 에너지가 (이 지역을) 통과하는 나라들이 자국 경제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며 한국과 일본 등의 동참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폼페이오 장관의 발언은 한국과 일본 정부가 아직 동참 여부를 고심 중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또 최근 한·일 양국 갈등으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파기까지 거론되며 미국의 두 동맹 국가가 분열하는 정세에서 호르무즈 해협 호위 연합체 구성 등 국제적 군사협력 활동을 통해 갈등을 봉합하고자 하는 미국의 바람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 정부가 일단 GSOMIA 연장 여부 재검토를 고려하고 있는 만큼 호르무즈 해협 파병은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에 정부는 미국이 원하는 카드를 들어주는 대신, 한·일 관계 또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정부는 올해 내 한·중·일 3국 정상회의 개최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한·중·일 정상회의가 연례적이긴 하지만 역사 문제에서 비롯한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로 한·일 관계가 최악의 위기로 치닫는 와중에 개최를 추진하고 있다는 의미여서 이 회의가 현 사태를 타개하는 데 또 다른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오미연 애틀랜틱 카운슬 전략·안보센터 ‘아시아 안보 프로그램’ 국장과 배리 파밸 선임 부회장은 보고서를 통해 한·일 간 현상 동결 합의 권고→한·일 양국 고위 당국자 간 신뢰 재구축을 위한 한·미·일 3자 회동 주선→역사적 분쟁 해결 및 유사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한 3자 간 틀 마련 등의 로드맵을 제시했다.

보고서는 “단기적으로 미국은 한·일이 현상 동결에 합의할 것을 계속 주장해야 한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양국의 추가 조치를 막고 협상할 시간을 벌기 위한 차원”이라며 “미국은 한·일 간 무역분쟁이 국제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교란시키는 걸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관련산업 및 소비자 등 미국의 국가 이익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미국이 추가 악화를 방지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미국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되 긴장 해결을 위한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한·일 양국의 국내 정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적극적인 미국의 관여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국내적으로도 현재의 정치 경로를 바꿀 납득할 만한 명분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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