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전문업체 직원 A씨, 해외연수 중 과로···귀국해 치료받았지만 숨져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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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출장 근무 중 받은 과중한 신체적 피로가 질병을 악화시켜 근로자가 숨졌다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야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화장품 연구개발 전문업체 H사 사무직 직원으로 근무하던 A씨는 지난 2016년 11월 7일부터 한 달 가량 중국 각지에서 진행하는 ‘차세대 지역전문가’ 연수과정에 참가했다. A씨는 연수 도중 얼굴과 다리가 붓고, 보행 시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같은 달 29일 귀국해 입원 치료를 받았다. A씨는 병원에서 루푸스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중 2016년 12월 3일 뇌내출혈이 발생했고, 이듬해 2월 숨졌다.

루푸스는 면역계 이상으로 온몸에 염증이 생기는 자가면역질환이다. 법원에 따르면 루푸스는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감수성 유전자와 환경적 요인의 작용으로 비성상적 면역반응이 나타나 병이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환경적 요인 중 자외선 노출은 약 70%의 루푸스 환자에게 증상 악화를 초래한다. 루푸스로 진단받은 환자의 90%이상이 진단 2년 후 생존해 있고, 최근 보고는 10년 생존율이 80~90%로 보고되고 있다.

A씨의 유족은 근로복지공단(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공단은 ‘업무관련성이 낮다. 망인이 귀국 전 1주일동안 근무한 시간이 일상 업무시간보다 과하게 증가하지 않았다. 망인이 만성적으로 과로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이 청구를 기각했다.

이에 A씨의 유족은 ‘망인이 연수에 참가해 장거리를 여행하면서 긴 시간 근무했고 강한 자외선에 평소보다 많이 노출돼 적어도 루푸스의 진행 속도를 급격하게 악화시켰다. 사망과 업무 사이 인과관계를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법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회사는 A씨에게 4주간 2000㎞를 여행하며 중국 시간, 뤄양, 정저우, 창즈, 칭다오, 톈진 등 주요도시들을 탐방하고 각 도시의 대학과 시장에서 소비재 유통 채널을 조사하게 했다. 또 A씨의 동료 직원들은 연수 중 하루 종일 관람이나 시장조사를 위해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니는 등 이동시간이 많아 피로도가 높았다고 진술했다.

특히 한 동료 직원은 “망인이 연수를 준비하던 중 매우 심한 신체적 피로를 호소했다. 출국 직전에는 발이 부어 운동화를 빌려준 적도 있다. 감기가 심하게 걸렸는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법원은 이 같은 사실관계를 종합 판단한 결과 연수 전부터 루푸스 증상을 보였던 A씨가 연수 도중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먼 거리를 여행하면서 과중한 신체적 피로를 받았고, 다량의 자외선에 노출돼 그 결과 루푸스가 자연적인 진행속도 이상으로 악화돼 뇌내출혈이 일어나 사망했다고 판단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장낙원 부장판사)는 A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8일 밝혔다.

재판부는 “망인과 같이 당뇨나 고혈압을 앓지 않은 건강한 여성에게서 뇌내출혈은 흔하지 않은 질병이다”며 “루푸스로 인한 뇌혈관염, 혈소판 감소증 등이 뇌내출혈로 이어졌고 그 결과 나타난 뇌부종 등으로 망인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므로 기저질환인 루푸스가 악화돼 사망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루푸스 환자는 10년 생존율이 80~90%에 이르는 만큼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증상이 완화되고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생기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며 “망인은 이 사건 연수가 시작할 무렵 루푸스 증세가 이미 나타났음에도 초기부터 적절한 진료를 받지 못해 병세가 계속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망인은 연수에 참여해 3주간 상당한 거리를 여행하면서 중국 각지의 대학과 시장을 탐방하는 과정에서 외출을 반복했다. 이에 따라 사무실 내에서 근무하던 것과 달리 하루 종일 직접 걷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해 먼 거리를 움직이면서 다량의 자외선에도 지속적으로 노출됐다”며 “결국 망인은 연수 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과중한 신체적 피로를 느끼고, 반복적으로 자외선에 노출돼 평소보다 루푸스 증세가 빠른 속도로 악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망인의 사망과 그가 수행하던 업무 사이에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며 “이와 다른 전제에서 이뤄진 공단의 처분은 위법해 취소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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