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미국의 중재 가능성도 현재는 높지 않아’ 분석

2016년 10월 23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연례 일본 육해공 자위대 열병식에 참여했다. / 사진=연합뉴스
2016년 10월 23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연례 일본 육해공 자위대 열병식에 참여했다. / 사진=연합뉴스

일본의 한국 대상 수출 규제 등 도발 국면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아베 정권의 수출 규제 조치 등의 근본적 목적은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전쟁할 수 있는 국가화, 이를 위한 역사 왜곡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베 정권의 오랜 전략이며 장기 계획으로 평가된다.

일본은 지난 4일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고순도 불화수소 등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의 수출 규제에 나섰다. 이어 일본은 한국의 캐치올 제도가 불충분하다며 우호국에 수출통관 간소화 혜택을 주는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캐치올 제도는 수출 금지 품목이 아니어도 상대국의 대량살상무기 등으로 이용될 수 있는 물품 수출 시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한 제도다. 일본 정부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법령 개정을 위해 오는 24일까지 의견 수렴한다. 이후 각료회의에서 최종 결정해 공식 발표한다.

이 외에도 일본은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른 중재위 구성 요청에 대한 한국 정부의 거부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등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이러한 조치에 나서는 이유로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한국의 전략물자 관리 체계 불충분 등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캐치올 제도는 일본보다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한국은 백색국가에 캐치올 제도 3대 요건 중 두 가지인 ‘인지’(Know), ‘통보’(Inform)를 적용한다. 비 백색국가에는 ‘의심’(Suspect)을 더해 3개 요건을 모두 적용한다. 반면 일본은 백색 국가에는 해당 요건을 제외해주고 있다. 비(非) 백색국가는 인지와 통보만 부분 적용한다.

이처럼 일본이 빈약한 근거로 규제에 나서는 것은 아베 정권의 근본 목적이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불법인 식민지배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또한 남북미 간 비핵화와 평화체제로의 전환도 일본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이 평화헌법 개정의 한가지 논리로 이용했던 북한 위협과 냉전 체제가 평화체제로 바뀌면 그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일본의 도발은 오랜 전략이었으며 장기 계획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아베 정권의 근본적 목적과 전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일본의 한국 대상 규제 도발 등도 여러 가지 형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국제법 박사)은 22일 “일본의 도발은 장기화 될 것”이라며 "아베 정권의 근본 목적이 2차대전 전후 체제로부터 벗어나는 탈각과 역사수정주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 센터장은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을 문제 삼는 것, 지난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한일 갈등을 이용해 개헌 발의선을 확보하려 했던 것 모두 평화헌법 개정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라며 “이는 일본이 오랫동안 준비한 전략이며 장기 계획 하에 이뤄진 것들”이라고 했다.

실제로 아베 정권은 강제징용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제기하는 사과와 배상 문제에 대해 ‘1910년 한반도 식민지배는 합법적이었다’는 주장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 문제는 모두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도 센터장은 “이 외에도 아베 정권은 남북미가 평화체제를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이루는 것과 대립되기 때문”이라며 “아베 정권은 미국을 끌어들여 집단적 자위권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남북미 판문점 회동에서 평화체제 구축의 교두보가 마련되면서 일본이 견제에 나선 것”이라고 했다.

한미일 공조를 위한 미국의 한일 갈등 중재를 기대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도 센터장은 “미국은 신고립주의를 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문제에 관여하기 원하지 않는다”며 “이 틈을 아베가 정확히 보고 노린 것이다.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무역 규제에 나서는 것을 따라 한국 대상 규제에 나선 것이다. 오랜 전략적 준비를 하다가 틈을 노려 한국 규제에 나선 것”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한일 갈등과 관련해 한일 양쪽 모두에서 요청이 있으면 관여를 하겠다고 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한일 양국이 둘다 원하면 관여할 것이다"고 한 점과 “그들이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 정황 상 당장 중재에 나서기보다 상황을 지켜볼 것으로 보인다. 이날 미국 국무부는 한일갈등의 중재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은 현 상황에서 한일 간 역사·경제 갈등에 중재를 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국가 간 관계에 개입하지 않으려한다”며 “중국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도 오바마 정부 때는 한·미·일 공조가 중요했지만 트럼프 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중국 견제에 대한 공조를 다변화했다. 한·미·일 공조에 예전만큼 매달릴 필요성이 줄었다”고 말했다.

도 센터장은 “아베 정권은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기 위한 평화헌법 개정과 역사 수정에 대해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한국 정부는 WTO(세계무역기구) 등 다자적 규범 체제 속에서 대응해야 유리하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1조, 10조, 11조를 위반했다. 2014년 일본은 한국 정부에 후쿠시마 방사능 수산물 수입 규제 철폐를 요구하며 WTO에 제소했지만 결국 패소한 바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4년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방사능 수산물 수입을 규제하는 한국에 대해 철폐를 요구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은 결국 WTO에 제소했지만 올해 4월 최종 패소했다. 그럼에도 판정 직후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유럽연합 정상들과 만나 오히려 WTO가 산업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다며 개혁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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