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대첩 승리 도와···독립군 장교 500명 길러내
일제에 붙잡혀 9년간 회유 압력에 끝내 거부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김혁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김혁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김혁 선생은 자유시사변으로 인한 독립군들의 고난을 극복하고 독립군 단체를 통합했다. 청산리 대첩 승리를 도왔다. 선생은 대한독립군정서를 이끌며 무력투쟁을 통한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했다. 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하고 친일 밀정을 처단했다. 선생은 성동사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중견 간부 500여명을 육성했다. 일제에 붙잡혀 감옥에서 9년간 회유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거부했다.

김혁 선생은 1875년 10월 6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898년 6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900년 1월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1897년 대한제국 성립 후 육군무관학교 교육은 자주 국방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했다. 반일적 성향의 민족교육을 했다.

선생은 대한제국 시위 보병 제1연대에서 부관 장교로 근무했다. 그러나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항일투쟁을 결심했다.

이후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 이에 선생은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해 나라를 구하는 길을 찾았다.

◇ 무장투쟁으로 일제 습격···북로군정서 통해 청산리 대첩 승리 돕다

선생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용인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일제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서간도 유하현으로 망명한 선생은 흥업단을 찾아갔다. 흥업단은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통해 동포사회의 발전을 지원한 단체다. 선생은 흥업단의 부단장을 맡았다.

흥업단은 대한독립군비단, 광복단, 태극단, 대진단 등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사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 가을 군비단, 태극단과 함께 의용대를 갑산·신흥 등지로 보내 적 경찰대를 습격해 섬멸했다. 그 해 겨울 군비단·태극단·광복단 등 장백·무송 지구의 무장 단체들과 연합해 대한국민단이라는 대군단을 이뤘다. 1922년 8월 박준혁·강승경이 이끄는 1대가 삼수군의 영성주재소를 습격해 승리했다.

흥업단이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로군정서와의 관계가 있었다. 당시 흥업단 군사활동의 기반은 청년훈련소인 연무소에서 배출된 청년군사들이었다. 이들의 교육은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참모와 군인들이 했다. 전성호, 강승경이 군사교육을 시켰다. 선생과 박장빈, 이옥규, 최시언, 한승제 등이 조직, 훈련, 작전 등을 지도했다.

1920년 8월 대한제국 군대에서 정위를 지냈던 김혁 선생은 흥업단을 떠나 북로군정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선생은 북로군정서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 선생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현재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훈처에 따르면 당시 선생은 북로군정서 대원들과 함께 청산리대첩에 참여해 승리를 이끌었다.

◇ 자유시사변 고난 극복하고 독립군 단체 통합하다

이후 선생은 북만주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는데 참여했다. 그 이후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의 충격으로 북로군정서 장병들이 흩어지고 총재 서일이 자결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다.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의 결과가 있었다.

이에 김혁 선생은 현천묵, 나중소 등과 함께 난관을 극복해 가며 군세를 수습 정비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로 돌아와 각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는 데 노력했다. 이에 1922년 8월 남만주 마권자(馬圈子)에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한교회, 대한광복단군영, 대한정의단군영, 대한광복군총영, 평북독판부, 통군부 등 8개 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하며 대한통의부를 만들었다.

대한통의부는 군대인 대한통의부 의용군을 편성하고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선생은 대한통의부의 군사부감이 됐다. 이후 선생은 1924년 초 북만주로 이동해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했다. 조성환, 나중소, 김규식, 이장녕 등과 함께 참모로 활동했다.

1925년 1월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가 열렸다. 이를 통해 1925년 3월 북만주 지역의 통일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가 만들어졌다. 선생은 대한독립군정서 대표의 1인으로 참석했다.

신민부는 동포에 대한 자치활동, 북만주 지역 친일 밀정 처단 등을 했다. 국내에 요원을 보내 조선 총독 처단을 계획했다. 선생은 신민부에서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신민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선생이 이끌었던 독립군정서의 목표는 무력투쟁을 통한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이었다. 대한독립군정서는 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했다. 이를 바탕으로 친일 밀정을 처단하고 국내로 진격해 일제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또 흑룡강성 오운현에 사관학교를 만들어 군인을 기르고자 했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정서의 목표는 선생이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신민부로 이어졌다. 그 결과 목릉현에 성동사관학교가 만들어졌다. 김혁 선생은 성동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 독립군 중견 간부 500여명 육성하다

성동사관학교에는 초기 150명의 청년을 선발해 독립군 사관을 양성했다. 성동사관학교는 매년 2회 사관을 양성해 총 500여 명을 졸업시켰다. 졸업생들은 신민부 독립군의 중견 간부가 돼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선생은 신민부의 세력 확대에도 힘썼다. 동포들을 독립운동 전선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신민부는 1926년 5월 남쪽의 장백산맥 주봉인 백두산 지역을 실력양성소 예정지로 지정했다. 선생도 이 곳으로 갔다. 선생은 이강훈으로부터 그동안 견문한 각지의 실정을 보고 받고 동포들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교육기관의 설치임을 알게 됐다. 선생은 이를 허락하고 엄우영을 교원에 임명하고 이강훈으로 하여금 교육사업을 돕도록 했다. 이곳 동포들도 자진해 교사를 건축하는 데 도왔다.

◇ 일제에 붙잡혀 9년간 회유 압력 받았으나 거부

1928년 1월 25일 선생을 포함해 신민부의 핵심 간부들이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과 그에 매수된 만주경찰대에 붙잡혔다.

신민부는 선생 등 중요 간부 12인이 체포돼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상황은 재만 독립운동계의 전체적인 위기감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민부는 혈전태세를 갖추고 보민회 등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던 친일 주구들을 처단했다. 또 일제 앞잡이 기관인 하얼빈 조선인거류민회에 대한 파괴 활동을 해 나갔다.

일제에 붙잡힌 선생과 신민부원 10명은 신의주로 호송돼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29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선생은 징역 10년형을 받은 뒤 평양복심법원에서 공소를 취하해 형이 확정됐다.

선생은 신의주형무소, 평양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에서 혹독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선생은 의연히 일제의 회유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9년여의 옥고로 선생은 병을 얻었다. 선생은 1936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했으나 1939년 4월 23일 6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본년(1924)은 갑자년에 해당하고, 조선독립 실현의 기운이 익어오고 있다. 두만강을 건너 삼각산 상에 태극기를 세우고 만세를 높이 부르며 우리 민족이 왜노(倭奴)의 압정을 제거하고, 열국(列國)에 우리의 독립을 선포하는 최초 시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방해하는 자는 군법에 의하여 엄히 처벌할 것이요, 우리 민족 된 자는 이 때를 당하여 전력을 다해서 후원하여야 할 것이다. - 선생이 조직한 대한독립군정서의 결의사항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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