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핵심기술 육성책·기업 간 협업 요구돼

/그래픽=이다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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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이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대응책을 고심하는 가운데 현 상황이 수년간 지지부진했던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국산화에 마중물이 될지가 주목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선 정부의 단순 자원 지금을 넘어 중장기적인 소재 개발 전략 수립에 주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동안 다소 취약했던 국내 기업 간 기술개발 협업 역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8일 일부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품목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 이날 일본 NHK는 “일본 정부가 이번 조치를 계기로 한국 측에 원자재의 적절한 관리를 촉구할 생각”이라면서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없을 경우, 규제 강화 대상을 다른 품목으로 확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한국 측 대응을 신중히 지켜볼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당장 타격이 예상되는 반도체업계는 물론, 정부도 사태 대응에 분주한 모습이다. 전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직접 일본으로 출국했다. 구체적 일정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업계에선 반도체 관련 인사들을 만나 수출 타격을 최소화할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한 행보로 전해진다. 또 이날 국회에선 문희상 국회의장이 주재한 회동을 통해 여야 3당이 이달 중으로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방일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당국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달 중으로 반도체 소재 집중 투자 계획을 확정해 발표할 방침이다. 내년부터 10년간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개발에 매년 1조원 이상 투입하는 집중 개발 사업이 현재 예비타당성 조사 절차를 밟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국내 반도체 소재 산업 육성에 주목도가 높아진 점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 반도체 소재 국산화 50%···기업 간 기술협업 요원

지난 4일 일본 정부는 수출 규제 강화 품목으로 불산(HF)·포토레지스트(PR)·불화 폴리이미드(FPI) 등 첨단 소재 3종을 올렸다. 일본 기업은 그간 포괄 허가 방식으로 한꺼번에 심사를 받아 수출했는데, 이로 인해 각 건별로 개별 허가를 받아야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심사 기간만 약 90일이 걸릴 전망이다.

반도체 식각 공정에 쓰이는 불산과 노광 공정에 쓰이는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제조 공정의 핵심 소재인데 일본 업체의 시장 공급력이 절대적이다. 특히 포토레지스트 품목엔 삼성전자가 차세대 노광장비로 활용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용 포토레지스트가 포함됐는데, 이는 전량 일본 업체 신예츠·스미토모화학·JSR·TOK 등늬 업체로부터 공급받는다. 불산의 경우 고순도 정제 기술을 확보한 일본 모리타·스텔라 등의 업체가 99.99% 이상 고순도 제품을 공급 중이다. 

국내 업계 역시 제품 개발을 해 왔으나, 핵심 공정에선 여전히 일본 제품을 대체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강하다. 업계 일각에선 기업 간 기술협업 부족을 원인으로 꼽는다. 일본 소재업체가 한국이나 미국 반도체회사와의 협업을 통해 역량을 키워 온 반면, 국내 업계는 후발주자로서 시장 진입 기회가 부족했다는 설명이다. 반도체산업선진화연구회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반도체 소재 국산화 비중은 50% 안팎에 머물렀다.

이어 연구회는 보고서를 통해 “국내 업계가 일본 재료업체 대비 5~6년 늦게 개발을 시작했고, 이를 따라 잡기 위해 국책 과제, 상공부 과제 등이 진행됐으나 반도체 기업의 무관심으로 진전이 미비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국내에선 중소 업체도 연구개발에 뛰어들 수 있는 공동연구소가 부재한 상태다. 반도체 소재 산업에선 전방 기업과의 기술협업이 필수적이다. 반도체산업선진화연구회는 보고서를 통해 “유럽이 IMCE, 미국의 경우 IBM 주관 및 뉴욕주 정부가 함께 알바니 컨소시엄을 통해 지원하는 반면 국내에선 공동연구소가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불산의 경우 국내 업체가 기술적 측면에서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선두업체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지적된다. 후발 업체로서 앞서 안정된 수율을 보이는 선두 일본 업체와 달리 중장기적 투자가 요구되는 한편, 1년 이상 품질 평가 기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전방 소자업체 입장에선 안정된 일본 제품을 수입해서 사용하는 것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 정부 지원 미비···"중장기적 전략·구심점 갖춰야"

정부 역시 반도체 소재, 장비 산업 육성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해당 품목의 국산화 비중은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소재가 국산화 비중 50%에 머무른 한편, 장비의 경우 수년째 20% 수준에 멈춰 있다. 그동안 정부의 소재, 부품 산업 지원책이 무역수지 개선에 집중되면서 중장기적 핵심기술 개발엔 다소 취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부 관계자는 반도체 소재 지원 사업을 두고 “이전 사업과 달리 이번엔 해외 의존도가 심한 소재를 중심으로 기술 자립화를 이뤄 미래 시장에 선제 대응하겠다는 목표로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이번 일본 수출 규제가 중장기적인 소재 기술 자립화를 앞당길 기회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그간 전방 소자업체에 쏠려 있던 시선이 후방 산업으로 쏠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 중장기적인 소재 부품 생태계 구축 방안이 요구된다. 중장기적 로드맵과 함께 사업의 무게중심을 잡을 범 부처 간 컨트롤타워가 없는 상황에선 정부의 지원 정책 역시 단기적 미봉책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후방 업체가 약한 기술경쟁력을 보이는 원인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며 “국내 전방 업체들이 소재업체들에게 기회를 주는 일에 소극적이다 보니 연구개발이 뒤처졌고, 이에 일본 업체에 자연스럽게 주도권이 넘어가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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