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 지난 4일부터 한국 핵심소재·부품 수출 규제 시행
‘WTO 위배 조치’ 놓고 한일 정부 이견···양국 경제 의존도 높아 타격 불가피
전문가들 “韓, 반도체 강국으로 위협받으면 세계 경제 어려워···초기 대응 중요”

일본 정부가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를 지난 4일 0시를 기점으로 시행했다. / 그래픽=이다인 디자이너
일본 정부가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를 지난 4일 0시를 기점으로 시행했다. / 그래픽=이다인 디자이너

일본 정부가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를 지난 4일 0시를 기점으로 시행했다. 당초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강화조치에 대해 무역보복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일본이 사실상 보복성을 인정하면서 한일 양국의 갈등이 결국 ‘강대강’ 무역 대치 국면이 본격화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보복성 규제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비롯해 엄중한 대응 조치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한일 양국의 무역갈등은 양국 기업체에 어떠한 이익을 줄 수 없을 뿐더러, 반도체 강국인 한국이 수출 제재에 가로막히면 전 세계의 경제가 미중 무역전쟁과 비슷하게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日, 강제징용자에 대한 불만으로 경제보복 조치 공식 인정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한일 양국의 갈등은 점차 커지고 있다. 국내에선 일본산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일본도 이번 문제에서 강경한 대응을 공언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도 일본이 일방적인 보복 조치를 취한 만큼 엄중한 대응 조치를 예고한 상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3일 도쿄 지요다구 일본기자클럽에서 “상대(한국)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우대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며 “수출규제에 강화 조치는 WTO에 위배되는 조치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아베 총리의 발언은 사실상 박근혜 정부 당시 체결한 한일 위안부 협상을 비롯해 한국 사법부가 판결한 일제 강제징용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에 불만을 품은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일본 정부는 지난 4일부터 반도체·스마트폰·디스플레이에 사용하는 우리나라 핵심소재·부품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섰다. 예전보다는 영향이 크게 줄었지만 일본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비중은 여전히 크다. 일본은 한국이 다섯 번째로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고, 수입은 세 번째로 많다. 수출과 수입을 합친 교역량도 지난해 851억 달러로 중국과 미국에 이어 3위를 차지한다.

이처럼 양국 간 경제적 의존관계는 깊다. 이에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가 본격화되면서 양국, 특히 기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 가운데 산업에 없어선 안 될 핵심 소재·부품·장비가 많은 만큼 한국이 오히려 더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4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일본의 수출 규제는 ‘명백한 경제 보복’이라고 규정짓고 정부 차원에서 반드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은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강제징용에 대한 사법 판단에 대해 경제에서 보복한 조치라고 명백히 판단한다”고 말했다.

그는 “보복 조치는 국제법에 위반되기에 철회해야 한다”며 “한국 경제뿐 아니라 일본에도 공히 피해가 간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본이 규제 조치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WTO 제소를 비롯한 상응한 조치를 반드시 마련하겠다”며 “해결이 안되면 WTO 판단을 구해야 하기에 내부 검토 절차가 진행 중이며, 실무 검토가 끝나는 대로 (제소)시기를 결정하겠다”고 설명했다.

◇“미래로 초점 맞춰 한일 갈등 중단시킬 초기 대응책에 총력 기울어야”

수출 규제가 격화될수록 한일 양국 기업의 피해도 커지는 만큼, 이번 일본 보복성 조치가 한일 무역전쟁으로 장기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청와대는 지난 4일 오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당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NSC 상임위원들은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대해 취한 보복적 성격의 수출 규제 조치는 WTO의 규범과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 것으로, 일본이 이번 조치를 철회하도록 하기 위한 외교적 대응 방안을 적극 강구해 나기로 했다.

당초 NSC는 서면브리핑을 통해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 정치적 보복 성격으로 규정한다”고 발표했지만, 발표 26분 만에 정치적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며 발언 수위를 낮췄다. 이번 사태에 대해 입장을 아끼며 로키(low-key)로 대응하고 있는 청와대가 공식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도리어 일본의 정치적 노림수에 말려들어간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은 다음달 2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

차재원 정치평론가는 “일본은 지난 4일부터 참의원 선거 활동을 하고 있는 만큼 국내 정치용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며 “지금 일본은 미중 무역전쟁처럼 자국 이익을 우선 시하는 기조를 펴며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결국 한일 갈등은 경제적으로 반도체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 만큼 장기화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차 평론가는 “특히 우리 기업의 피해가 큰 만큼 정부가 적극적으로 한일 갈등, 과거사를 풀어야 한다”며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과거사와 미래를 분리해서 미래를 바라보고 지금보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정부가 서둘러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면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오히려 장기전으로 이어질 수 있어 낙관적으로만 접근할 상황은 아니다”라면서 “일본 참의원 선거가 끝나면 괜찮아 질 수 있다는 기대는 접는 게 좋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조속히 끝낼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며 “초기에 총력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평론가는 청와대가 직접 나서 반도체 동맹 외교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한일 양국의 문제로 볼 게 아닌게, 한국의 반도체가 공급이 안되면 세계 경제는 혼란에 빠질 수 있어 4차산업혁명에 절대적인 저해 요인이 될 수 있다”며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반도체가 필요한 만큼, 미국과 유럽국가 심지어는 중국, 동남아 국가를 총동원해 전면전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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