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팹리스 지원, 선택과 집중 요구돼

“생태계가 다 깨졌다”

최근 기자가 만난 한 업계 관계자는 이 같이 말하며 “누가 1위 기업 시가총액 1조원도 안되는 업계에 투자를 하고 싶겠냐”며 한숨지었다. 국내 팹리스 업계는 돈이 잘 돌지 않는 구조다. 오랜 투자 끝에야 수익성을 간신히 건질 수 있는 산업 구조 때문에 시장 투심도 차갑게 식었다는 전언이다.

지난 2년간 이어진 ‘반도체 슈퍼사이클’조차 국내 팹리스 업계와는 무관한 얘기였다. 메모리 가격 상승세에 따른 호재는 전방 대기업에 쏠렸다. 국내 반도체 산업 지형은 대기업 중심으로 기울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60% 점유율을 올릴 때, 국내 시스템 반도체 부문은 전세계 시장의 5%에 못 미쳤다.

올 들어 정부는 이처럼 기울어진 운동장에 수평저울을 들이밀었다. 대기업 중심으로 형성된 국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다시 꾸리겠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향후 10년간 파운드리와 팹리스 업체에 1조원 규모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특히 팹리스 분야에선 민관이 손을 잡고 창업부터 성장단계까지 지원하고 반도체 설계 전문인력도 양성하기로 했다.

팹리스 지원을 주관하는 산업통상자원부는 자동차, 바이오·헬스, 스마트 가전 등 5대 유망분야 시스템반도체 수요연계형 연구개발(R&D) 사업에 2705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산업부는 기술 개발에 그치지 않고, 수요 기업과 연계해 제품 상용화까지 이끌기로 했다. 이들 5개 분야엔 연간 최대 300억원 규모 자금이 지원된다.

이번 지원책에 팹리스 업계는 대체로 반색하는 분위기다. 다만 지원 규모나 방식에 대해선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크다. 산업부가 추진하는 수요연계형 R&D 사업의 초기 세부과제 개수는 67개로 알려졌다. 올 연말 수요조사를 통해 과제 개수는 조정되지만 초기 방향성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이 짙다. 정부는 중소 중견사업체들에게 마중물을 붓겠다는 목표지만, 업계 일각에선 자칫 성과 없는 세금 ‘나눠주기’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한 팹리스 업체 관계자는 “칩 하나를 개발하는데 못해도 200억~300억원이 들어간다”며 “예산 5000억원이 있다고 해도, 500개 기업에 나눠주면 무슨 성과가 나겠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퀄컴이나 미디어텍과 같은 회사를 원한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간 이뤄져 온 정부 국책 사업 실패를 반추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책연구 사업성과들이 지금 다 어디로 갔는지는 의문”이라며 “국책 사업으로 수억원 규모의 지원금을 받으며 근근이 연명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시스템 반도체 육성 사업에 대한 우려는 ‘이번엔 달라야 한다’는 기대에서 피어났다. 지난 2011년에도 정부는 팹리스 업계를 일으키기 위해 ‘스타팹리스 10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한 바 있다. 그때도 정부는 이번 지원사업과 마찬가지로 ‘팹리스 생태계 활성화’를 목표로 내걸었다. 성과는 아쉽다는 평가가 많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행정당국의 진정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진정성'이란 말엔 구태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우려와 기대가 담겼다. 정부는 실현 가능한 사업과 경쟁력을 갖춘 사업체를 선정해야 한다. 시작이 화려한 만큼 화려한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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