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100년과 독립운동가] ‘한국독립운동사략’ 저술해 민족의 독립투쟁 알린 김병조
[임정100년과 독립운동가] ‘한국독립운동사략’ 저술해 민족의 독립투쟁 알린 김병조
  • 이준영 기자(lovehope@sisajournal-e.com)
  • 승인 2019.06.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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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하고 신념 지켜···일제 앞잡이 된 조선인에 각성 촉구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김병조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김병조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김병조(金秉祚)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략', '독립혈사' 등을 저술해 한국 근대사에서 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항한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을 알렸다.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으로서 평안북도 지방에서 만세시위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선생은 일제의 앞잡이가 된 조선인들에게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김병조 선생은 1877년 1월 10일 평북 정주군 동주면 봉명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03년 구성군 방현면 변산동 삼희재서당을 인수해 신식 초등학교인 변산학교로 개편했다. 근대식 민족교육을 위해서였다.

선생은 변산학교를 1908년 기독교 학교로 개편했다. 목회 활동을 통해 국권회복과 민족 독립을 이루려고 했다.

선생은 1913년 3월 36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6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8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선생은 1919년 2월 이승훈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3.1독립만세운동 추진에 깊숙이 관여했다. 당시 이승훈은 3.1운동 추진의 핵심 인물이었다.

민족대표로서 평안북도에서 3.1운동 확산하다

이승훈은 평북노회가 열린 선천에서 김병조 선생을 만나 3.1운동 참여와 민족대표 선정을 요청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3.1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그 자리에서 김병조 선생과 이명룡·유여대·양전백 등 4인을 민족대표로 선정했다.

선생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하자 평안북도 도내 여러 지방을 비밀리에 다니면서 만세시위의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선생은 동포들의 만세시위 참여를 부추기는 ‘격고아한동포문(檄告我韓同胞文)’을 만들어 살포했다.

슬프다. 우리 팔도의 동포여!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크게 뉘우칠 지어다. 하늘의 모습을 우러러 보아라, 동방의 밝은 별이 이미 밝았다. 시국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아라, 집집마다 경종이 스스로 울리니 휘날리는 태극기는 제군들의 조국정신을 활발하게 하고, 열렬한 만세소리는 제군들의 일체 생명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도다. -격고아한동포문

선생은 그해 3월 7일 일제 관리로 근무하는 친일파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경고관헌문(警告官憲文)’을 발포했다.

이르노니 너희 조선인으로 왜놈의 관리된 자야 양심에 따라 스스로 반성하라. (중략) 의를 의지하고 일어선 2000만 민족이 모두 너희들을 쳐죽일 생각임을 모르는가. 아니면 절개를 지키며 숨져간 30만 충령이 이미 너희를 죽이기로 한 결정을 모르는가. 위로는 하늘이 두렵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느냐. 너희 할애비 너희 애비의 피가 과연 네 골수에 흐르고, 충이니 의이니 하는 마음이 아직도 네 마음속에 남았거든 북을 치고 공격할 때를 기다리지 말고 힘을 내어 무기를 거꾸로 들고 돌이켜 길을 바꿈으로써 크게 후회하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여라. -경고관헌문

이후 선생은 4월 중순경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선생은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0년 3월 25일까지 약 11개월 동안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외교 선전 활동과 사료 편찬 역할을 했다. 선생은 ‘한국시사진술서’를 손정도·장덕로·김시혁·김승만 등 11명의 기독교 목사와 장로 명의로 작성했다.

한국시사진술서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한국 대표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고 세계장로교연합회 및 미주 각 교회에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은 손정도 목사와 ‘한국 기독교 대표들이 중국 기독교계에 고하는 글’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기독교계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한국독립운동사략’ 저술해 민족의 독립투쟁 알리다

1920년 선생은 임시정부의 지방선전부 이사로 선임돼 국내 선전 활동을 했다.

선생은 안창호를 도와 지방 선전대원들을 국내로 보내 임시정부의 활약상을 국내 동포들에게 알렸다. 국내 통치 자료와 독립운동 정보를 수집했다.

선생은 1921년 4월 신익희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만들었다. 한·중 양민의 우호를 통한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특히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사료 정리 편찬에 힘을 쏟았다. 3.1운동사 등 독립운동사를 정리해 국제사회에 일제의 침략상과 우리 민족의 대대적 독립투쟁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안창호는 ‘임시정부 진행방침’을 발표하면서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한 자료로 ‘한일관계사’를 조사 편찬하고 있는 사실을 알렸다. 그 편찬 기관이 국무원 직속의 임시사료편찬회였다. 실무는 김병조 선생과 이원익·김두봉·김여제 등 사료편찬위원들이 맡았다. 이들은 ‘한일관계사료집’ 전4권을 편찬했다. 고대로부터 경술국치에 이르는 사료는 김두봉이 썼다. 그 이후 독립운동사료는 선생과 이원익이 맡아 편찬했다.

선생은 임시사료편찬회에서 수집된 사료를 기초로 ‘한국독립운동사략’을 저술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1920년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항한 한국 민족의 독립투쟁이라는 시각에서 정리했다. 이 책은 독립운동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했다. 1920년 같은 시기 간행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함께 널리 읽혔다.

또 선생은 1924년 만주 집안현에서 ‘독립혈사’와 ‘대동역사’를 저술했다. 1926년 ‘한국역사’의 초고를 작성했다.

1919년 임시정부 사료조서편찬회 요인들. / 사진=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1919년 임시정부 사료조사편찬회 요인들. / 사진=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선생은 1923년 5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만주 서간도로 옮겨가 집안현 화전자교회와 패왕조교회를 담임했다. 국가보훈처는 “임정의 존폐 문제를 둘러싼 개조파와 창조파의 격한 투쟁을 보면서 선생은 상해에서 정쟁에 휘말리기보다는 재외 한인동포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 것으로 생각된다”며 “서간도로 근거지를 옮겨 목회 활동을 통해 한인 동포들의 종교적·민족적 결속을 다지며 독립운동 주체로의 육성을 모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선생은 1933년 4월 귀국했다.

귀국 도중 선생은 신의주역에서 일경에 의해 연행됐다. 선생은 일제로부터 앞으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일제에 협력하겠다는 자술서 작성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끝내 거절했다. 이 때문에 선생은 ‘요시찰인’으로 찍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선생의 활동 지역은 용천군 양서면 일대 30리로 제한됐다. 선생은 양서면 일대 동상·북평·신서교회에서의 목회 활동과 경신학교 운영을 통해 민족의 앞날을 준비했다.

일제의 협력과 신사참배 강요 끝까지 거부하다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 당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고 했다. 일본어 상용(1937. 3), 신사참배(1937. 7), 황국신민 서사(1937. 10), 창씨개명(1939. 11) 등의 민족말살정책이었다.

선생은 신사참배를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써 민족적, 종교적 양심을 지키고자 했다. 신사참배문제는 목사이자 민족대표인 선생에게 있어 종교적 양심의 문제인 동시에 민족적 양심의 문제였다.

일제에 의해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선생은 1941년 정주군 덕언면 덕흥동 묘두산으로 피했다. 선생은 은둔지에서 1945년 8․15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곧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했다. 선생은 1945년 9월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만들어 민족 독립국가 건설운동에 나섰다. 선생은 소련군의 북한 공산화 조치에 반대했다. 1945년 11월 광복단을 만들어 반소·반공·반탁운동을 했다.

선생은 1946년 12월 24일 정주에서 체포돼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옮겨졌다. 선생은 결국 여기서 1950년 73세에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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