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동시 추진 경우 법 개정 국제적 기준 못 맞춰 지적···공익위 안 중심 법 개정 방향성 논란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ILO(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과 입법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정부 입장이 기존의 선입법 후비준 입장과 결과 면에서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비준과 입법을 동시에 추진하는 경우 결국 관련 입법을 국제 기준에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달 22일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ILO 핵심협약 미비준 4개 핵심협약 중 3개 협약에 대해 비준을 추진하겠다”며 “협약 비준에 요구되는 법 개정 및 제도개선도 함께 추진하겠다. 정부는 올해 정기국회에서 3개 협약에 대한 비준동의안과 관련 법안이 함께 논의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대통령 직속 사회적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사관계 제도에 관한 사회적 합의에 실패하자 나온 입장이다. 정부는 원래 사실상 ILO 핵심협약 선 입법, 후 비준 입장이었다. 그러나 경사노위 합의가 실패하고 유럽연합(EU)의 ILO 핵심협약 비준 압박 강화,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선 비준 후 입법 요구가 거세지면서 비준과 입법의 동시 추진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ILO 핵심협약 비준과 입법 동시 추진은 기존의 선 입법, 후 비준과 결과 면에서 같다는 지적이 나왔다. 비준과 입법을 동시에 추진하는 경우 관련 입법을 국제 기준에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과 입법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의미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관련 법 개정안을 올리고, 동시에 국회 통일외교위원회에 ILO 핵심협약 비준 동의안을 상정하겠다는 의도다. 이 경우 ILO 핵심협약 관련 법 개정이 국제 기준에 맞춰질 수 없다는 지적이다.

4일 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은 “정부의 비준과 입법 동시 추진 의미는 경사노위에서 관련 법 개정 방향 합의가 불가능해지자 이 논의를 국회에 넘겨서 법 개정을 한다는 것으로서 기존의 선 입법 입장과 같다”며 “비준과 입법을 동시에 하면 ILO 핵심협약 관련 법 개정을 국제기준에 맞출 수 없다. 중요한 것은 ILO 핵심협약을 국제 기준에 맞춰 법 개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류 국장은 “정부는 ILO 핵심협약을 비준부터 해야 한다. 이후에 법 개정은 ILO 안에 있는 전문가위원회가 수행하는 ‘정기 감시감독 메커니즘’을 활용해 국제적 기준에 맞춰 해야 한다. ILO의 '정기 감시감독 매커니즘‘은 핵심협약 비준 후 해당 국가의 법제도 등이 협약이랑 일치하는지 점검하는 시스템이다”며 “그래야 법 개정 수준을 국제 기준에 맞출 수 있다”고 했다. 관련 법 개정이 비준과 동시에 이뤄질 경우 야당과 사용자 입장이 반영돼 국제 기준에서 후퇴한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ILO 핵심협약의 비준과 입법 절차는 국회에서 동시 추진될 수 밖에 없다”며 “비준부터하면 비준 후 법 개정 전의 기존 국내법과 상충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류 국장은 "핵심협약은 비준 1년 후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1년이 지나면 협약이 국내 법체계에 통합된다"며 "만약 1년 내에 법개정을 완료하지 못하면 협약이 신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개정되지 않은 법보다 우선 적용된다. 이때 적용되는 협약은 협약 본문에 명시된 추상적 문구만이 아니라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 또는 전문가위원회가 만들어온 판정례도 포함된다. 이렇게 되면 법이 개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법적용에 혼란이 있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 ILO 핵심협약 법 개정 방향성 논란도 커···노동계 “정부, 비준과 노동법 개악 교환”

특히 정부가 밝힌 ILO 핵심협약 관련 법 개정 방향성에 대한 논란도 일고 있다. 정부는 노사 양쪽에서 모두 논란이 됐던 ILO 핵심협약 관련 경사노위 공익위원 안을 법 개정 방향에 참고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지난달 22일 이재갑 장관은 “결사의 자유 협약(제87·98호) 비준을 위한 법 개정과 관련해 지난 4월 15일 발표된 경사노위 최종 공익위원 안을 포함,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공익위원 안은 현행 최장 2년인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3년으로 연장할 것을 권고했다. 공익위원 안은 파업에 들어간 노조의 사업장 점거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정비하라고도 권고했다.

특히 여당 안에서 나온 한정애 의원의 관련 대표 발의안에 대해서도 노동계는 개악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12월 28일 발의된 한정애 의원안은 해고자의 노조 활동에 제한을 뒀다. 종사자가 아닌 경우 노조 임원이 될 자격을 제한하고 사업장 출입 시 사용자에게 목적, 시기 등을 사전 통보하도록 했다. 다만 사용자가 이를 합리적 이유 없이 거부하지 못하도록 했다.

류 국장은 “한국노총, 사용자단체, 정부가 각각 추천한 경사노위 공익위원들은 양측의 입장을 적절히 수용해 그동안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가 십수 년 동안 정부에 권고한 내용에 크게 미달하는 방안을 내 놓았다”며 “정부 입장을 고려한 한정애 의원의 법 개정안은 공익위원들이 제시한 안에서도 중요한 요소들을 누락했을 뿐 아니라 개악 요소를 추가했다. 결국 ILO 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악을 교환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익위 안은 경영계에서도 반발했다. 공익위원안은 경영계의 요구였던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과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처벌 폐지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등용 정의당 정책연구위원은 “정부가 노사 사이에서 애매하게 ILO 핵심협약 비준과 입법을 동시에 추진하겠다고 하는 중이다. 다만 정부가 탄력근로제 확대, 최저임금 속도조절 등 노동존중사회에서 기업 중심으로 입장을 바꾸고 있다”며 “이 상황 속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을 두고도 노동계와 정부의 갈등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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