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 공주병원장 시절부터 현장 찾아 상담하며 트라우마 회복 지원
진주 안인득 사건 핵심 증상은 자신만 살았다는 죄책감···10년 경험과 연구, 환자 상담에 활용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 / 사진=시사저널e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 / 사진=시사저널e

“이번에 새롭게 문을 연 영남권 국가트라우마센터를 통해 영남권 재난 피해자들에 대한 심리지원 업무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자 합니다.” 

지난 21일 영남권 국가트라우마센터 개소식을 가진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은 개소 후 더욱 분주한 모습이었다. 국가트라우마센터 이야기에 앞서 일단 국립부곡병원(이하 부곡병원)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을 위해 병원 소개부터 들어봤다.

“우리 병원은 보건복지부 소속기관으로 정신과 진료만 전문으로 하는 국립정신병원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현재 복지부가 직접 운영하는 국립병원은 모두 9개소입니다. 그중 5개소가 정신과 전문병원입니다. 나머지는 결핵병원 2개소, 나병원 1개소, 재활병원 1개소입니다. 정신병원 5개소는 각 권역별로 배치돼 있습니다. 우리 부곡병원은 경남 창녕에 위치해 영남권역 내 국민정신건강증진과 관련된 여러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에는 5개의 국립정신의료기관이 있다. 서울 등 수도권은 국립정신건강센터, 호남권과 제주도는 국립나주병원, 강원도는 국립춘천병원, 충청권은 국립공주병원이 각각 그 권역의 정신건강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원장이 근무하는 부곡병원은 부산과 대구, 울산, 경북, 경남 지역 등 5개 지자체를 포함하는 영남권을 관할한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3 가량, 전 국토의 1/3 가량이 이 영남권에 속한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5개 국립정신의료기관 명칭에 ‘정신’자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사회가 아직은 ‘정신’이라는 명칭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많이 갖고 있어 이용하는 분들 마음을 편히 해드리고자 명칭을 바꾼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들은 저희 병원을 종합병원으로 오인해 타 과 진료에 대해 문의하시기도 합니다.”

특이한 것은 현재 부곡병원은 다른 4개 국립정신의료기관과 달리 일반정신질환자 진료 외에 마약중독자 진료와 범법정신질환자 진료까지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부곡병원 내 하부조직으로 약물중독진료소와 사법병동이 설치돼 운영 중이다. 특히 사법병동은 일반 국민들에게 생소한 내용이다.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 상태에서 중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교도소에서 형을 사는 대신 국가가 지정한 병원에서 강제로 치료를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를 치료감호라 하고 이는 치료감호법이라는 법에 근거해 집행됩니다. 예전에 이런 치료감호는 법무부 소속기관인 공주치료감호소에서만 시행됐습니다. 지난 2013년 개정된 치료감호법에 따라 부곡병원도 치료감호시설로 지정되는 바람에 공주치료감호소 재소자 중 일부를 우리 병원이 치료하게 됐고 이들이 수용된 병동을 사법병동이라 합니다.”

이 원장으로선 신경이 많이 쓰이고 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업무가 이 사법병동 관리라고 한다. 이어 인터뷰 본론인 국가트라우마센터로 이야기가 연결되자 이 원장 설명에는 좀 더 열기가 더해지는 것 같았다. 

“지난해 서울 국립정신건강센터에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설치됐고, 올해부터는 전국에 권역별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순차적으로 설치됩니다. 우리 영남권이 그 첫 시작으로 부곡병원 내 영남권 국가트라우마센터를 설치하게 된 것이죠. 국가트라우마센터는 정신건강복지법 15조 2항에 그 설치와 운영 근거와 기능을 명시해 놓았습니다. 재난 피해자에 대한 심리지원서비스는 물론, 재난심리지원 프로그램이나 매뉴얼 개발, 재난심리지원 관련 조사연구, 유관기관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재난심리지원 서비스 체계 마련 등 예기치 않은 재난으로 인해 심리적 트라우마를 입은 분들 치유와 회복을 위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일반인은 물론 다른 의사들도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재난심리지원에 대해 이 원장은 본인 경험을 곁들여 알기 쉽게 설명했다. 본인은 사양하지만 이 원장은 국내에서 재난심리지원 전문가로는 단연 톱이다.

“지난 2007년 12월 제가 충남에 있는 공주병원에 근무할 때, 충남 태안 해변이 온통 기름으로 뒤덮인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루아침에 생업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비탄에 빠져 그 중 몇 분이 극단적 선택을 하셨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가기관에 의한 재난심리지원이 시작됐던 때가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지부 지시로 태안 인근에 있던 공주병원이 재난심리지원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직원들을 인솔해 현장에 가보니 비록 제가 정신과 전문의이긴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트라우마나 재난심리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고, 저 역시 이에 대해 배운 바도 경험한 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마을 회관에 모이시라고 한 후 우울증 간이검사를 하면서 우울증과 자살예방에 관한 계몽성 강연을 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당신이 우리 입장이 돼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냐는 격앙된 주민들 반응에 쩔쩔매다가 결국 그 자리를 도망쳐 나오고 말았습니다.”    

이 날의 경험은 이후 이 원장을 많이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재난 피해자의 트라우마 회복을 위해 뭘 해야 되고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이들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외국에 나가 연수를 받거나 교육기관에서 전문적 연구를 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고 해외 전문가들의 활동 영상, 예를 들면 해외 난민 캠프에서 심리지원 영상들을 구해 그들의 언어 사용이나 시선처리까지 유심히 보면서 그러지 않아도 힘든 피해자들에게 오히려 폐를 끼치는 무능한 상담가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묘하게도 이후 이 원장에겐 그런 재난 현장에 동원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최근 몇 년 사이만 해도 지난 2016년 경주 지진, 2017년 포항 지진, 2018년 밀양 세종병원 화재, 그리고 최근 진주 방화 살인 사건까지 주요 재난현장에서 이 원장은 재난심리지원활동을 주도하거나 총괄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  

이영렬 원장이 원장실엣 포즈를 취하는 모습. / 사진=시사저널e
이영렬 원장이 원장실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 / 사진=시사저널e

그러면서 이 원장에겐 그 경험들이 검증된 지식으로 내재화돼 갔다. 거기에 덧붙여 이 원장은 복지부 고위공무원으로서 재난 현장 심리지원을 주도해야하는 리더십까지 발휘해야 했기에 나무와 숲을 동시에 봐야하는 입장이었다. 이는 이 원장을 독보적인 재난심리지원 전문가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물론 이렇게 불리는 것에 대해 이 원장은 마음이 편치가 않다고 한다. 본인이 노력하거나 잘해서 된 일이 아니라 모두 우연에 우연이 꼬리를 물며 몰아간 결과일 뿐이고 더구나 좋은 일로 전문가 소리를 듣는 게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재난심리전문가로서 갖춰야 할 기본 자세에 대해 묻자 이 원장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일단 재난을 겪은 분들에게 무리하게 다가가면 절대 안 됩니다. 그 분들은 상담 받을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분들에게 여기 당신을 도와 줄 전문가가 준비돼 있다는 사실만 알리고, 옆에 앉아 그분들을 지켜보면서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다보면 피해자가 말을 걸어옵니다. 그때도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그게 먼저고, 피해자에게 뭔가 묻고 싶은 게 있거나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피해자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인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게 상담자의 기본자세입니다. 섣불리 피해자를 가르치거나 계몽하려 한다거나 또는 자기 경험 등을 이야기하며 피해자를 격려하려 하면 그건 재난심리지원이 아니라 재난적 심리지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재난 피해자가 상담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다면, 그 때 전해야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 원장은 그것은 ‘희망의 스토리텔링’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 원장에 따르면 모든 재난 피해자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며 발전하는 ‘기-승-전-절망’의 스토리텔링이라고 한다. 일단 재난은 지나갔고, 나는 살아남았기에 이런 고통도 겪고 있는 것이니 상황을 객관적으로만 본다면 ‘미래의 희망’도 충분히 가져볼 여지가 있건만 재난 피해자는 그게 어렵다는 것이다.

심한 트라우마로 인해 정상적 인지과정이 마비된 상태라 이성이나 판단력이 그저 고통에만 사로잡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도 결론은 절망적으로 나오는 소위 기-승-전-절망 구도로 자신의 모든 일상을 각색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절망으로 연결시키다보면 극단적 선택을 하는 피해자도 나오게 되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승-전-절망 구도로 인해 소중한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하는 소위 트라우마 2차 피해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결국 피해자 인생을 점점 회복이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간다고 한다. 일상 회복이 어려우니 심리적 치유는 더 더욱 요원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절망적 스토리의 흐름을 바꿔야 합니다. 다른 측면으로 스토리가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 희망적 결론까지 가는 게 어렵다면 최소한 열린 결말로라도 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상담자는 피해자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가 그 맥을 잡아 피해자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도와줘야 합니다. 저는 대개 반문을 하는 방법을 많이 씁니다. 그 결과 피해자가 ‘아, 정말 그러네요’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 상담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상처에 박혀있던 쐐기가 뽑혀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남은 고름이 밀려나오면서 새 살이 차오르기 시작할 겁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이 원장에게도 매번 어려운 일이다.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며, 상담이 끝나고 나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완전 탈진 상태가 된다고 한다.

“얼마 전 심리지원을 한 진주 방화살인 사건 이른바 안인득 사건도 힘들게 진행한 경우입니다. 안인득이 살던 아파트 동에 80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중 35명을 제가 상담했습니다. 그 분들도 다 기-승-전-절망의 스토리로 괴로워하고 계셨는데, 그 분들 절망은 대개 죄책감과 연결된 절망, 즉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력함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안인득 사건에 대해 이 원장은 특히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가장 최근 상담을 진행한 사건이고, 특히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는 점에서 그런 듯 했다.

“이 분들 핵심증상은 죽음에 대한 공포라기보다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더 큰 것이었습니다. 저를 만난 분들은 모두 그 살해 현장을 지나갔던 분들입니다. 그 중 많은 분들이 그날 새벽 안인득을 직접 봤는데 누구는 그냥 보내고 누구는 살해하는 그 상황에서 아무 대처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게 너무 무섭고 괴로운데, 나중에 보니 그 살해당한 분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친숙하게 알고 지내던 이웃들이었으니 그 자책감과 무력감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에 이 원장은 그 죄책감은 이 아파트 주민인 당신이 느껴야 할 것이 아니라 안인득을 막아야 했던 사람들, 그래야 했고 그럴 기회가 있었음에도 안인득을 막지 못해 이런 참사가 일어나도록 한 사람들이 느껴야 할 일이라는 점을 지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왜 그들 죄를 당신이 뒤집어쓰려 하느냐고 반문하며 그 죄책감 스토리텔링의 허점을 파고들었다고 한다. 

“그 죄를 당신이 모두 뒤집어쓰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을 주로 했습니다. 당신이 느껴야 할 감정이 있다면 오히려 분노다. 이 얼마나 화가 나는 일이냐. 이런 논리로 그 분들과 상담을 했고 그 결과 그래도 많은 분들이 제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시고 얼굴이 조금은 밝아지셔서 자리를 일어섰습니다.”

그러면 진주에서 재난심리지원은 이걸로 충분한 걸까? 이 원장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재난 직후 이뤄진 심리상담은 일종의 심리적 응급처치라고 할 수 있다. 재난 후 최소 3개월 길게는 1년까지는 그 경과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진주 경우도 사건 발생 1개월이 경과하는 시점에 이 원장은 다시 현장을 방문해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면담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진주보건소와 추후 심리지원 계획들을 협의하고 있다.

이제 이런 업무들이 영남권 트라우마센터 개소를 계기로 좀 더 체계를 갖추게 됐다. 재난 피해자들을 충분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챙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즉 영남권 국가트라우마센터 설치의 가장 큰 의의는 그간 재난 시마다 다른 업무를 하던 인력들을 일시적으로 동원해 수행하던 재난심리지원업무를 국가트라우마센터라는 상설조직이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함으로서 그 전문성을 높이고 업무 연속성을 확보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터뷰 서두 이 원장이 이야기한 것처럼 영남권 재난 피해자들에 대한 심리지원 업무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원장 역시 우연의 힘에 의해 재난심리지원 업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다보니 그 방면 전문가가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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