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김복동 할머니 추모·기억전 개막식 열려···‘위안부 피해자 넘어 세계적 여성인권운동가’ 활동
“베트남 여성 베트남 전쟁 때 한국 군인에 피해 미안하다···내가 아파 봐서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희망을 잡고 살자.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내 뒤를 따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세계적 여성인권운동가였던 고(故)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에 한 말이다. 세계 곳곳의 전쟁과 권력 다툼 현장에서 여성들은 성폭력과 죽임 등 피해를 받고 있다. 김 할머니는 자신이 받은 고통을 승화시켜 전 세계에서 성폭력과 차별의 고통을 받는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려고 분투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해 성폭력과 고통을 당한 여성들의 아픔을 공감했다. 여성 인권을 넘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도 활동했다. 죽으면 나비가 돼 온 세계를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던 김 할머니. 지난 1월 28일 나비가 돼 날아갔다.

9일 김복동 할머니 추모와 기억전 개막식이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박물관)’에서 열렸다. 김 할머니가 별세한 지 102일째 되는 날이다.

박물관 뜰에 초등학생, 시민운동가, 대학생, 자녀를 데려온 부모 등이 오전 11시가 되자 모였다. 이들은 휠체어를 탄 한 할머니를 둘러쌌다. 길원옥 할머니였다. 길원옥 할머니는 김복동 할머니의 친한 친구였다. 일본군 위안부 고통을 함께 받은 길 할머니와 김 할머니는 친자매처럼 의지했다. 할머니들은 수요 시위에 같이 참여해 일본 정부에게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강제동원 인정 ▲전쟁범죄 인정 ▲법적 배상 ▲진상규명 ▲공식사죄 ▲전범자 처벌 ▲일본 역사교과서에 기록을 요구했다.

길원옥 할머니는 “사람이니까 잘못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오래 끌지 말아야한다”며 “일본 정부는 일본군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강제로 끌고 간 것과 전쟁 범죄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법적 배상을 응당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길 할머니는 “김복동을 잊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와 줘서 고맙다”며 “말이 안 나온다. 김복동과 같이 오래 지냈다. 김복동 할머니가 없으니 허전하다”고 했다.

이날 김복동 추모 기억전에 참석한 황세광씨는 “예전에 김복동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그 때 김 할머니가 여성 인권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았다. 김 할머니를 존경하게 됐다”며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사과를 했다고 하지만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상이 아니었다. 형식적 사과가 아니라 이러한 비극과 상처에 대해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추모와 기억전’은 오는 6월 8일까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열린다. 이번 특별전시회는 일본군 성노예제 생존자에서 여성인권운동가로 거듭난 김복동의 삶을 따라가며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중심으로 구성됐다.

지하 1층과 2층에는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라는 주제의 전시로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 영상, 활동하면서 남긴 말, 젊은 시절의 사진 등이 있었다. 1층 뜰에는 ‘불꽃처럼 나비처럼’이라는 주제로 김 할머니의 지난 삶에 대한 추억과 감정이 담긴 말과 그림, 활동 사진 등이 있었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서 여성인권운동가로 나아가

이번 전시회의 별도 전시 공간에는 우리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서 기억해야 하는 공간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 때 한국 군인들에게 성폭력과 고통을 당했던 베트남 여성들의 사진과 증언이 전시됐다.

김복동 할머니는 생전에 “베트남에서도 전쟁 때 우리 한국 군인들한테 피해를 입었다니까 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죄송하고 미안합니다”며 “우리가 아파봤기에 얼마나 아팠는지 압니다. 우리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아픔을 알기에 나비기금을 모아서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고 말했다.

9일 고 김복동 할머니 추모와 기억전 개막식이 이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박물관)’에서 열렸다. / 사진=이준영 기자
9일 고 김복동 할머니 추모와 기억전 개막식이 이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박물관)’에서 열렸다. / 사진=이준영 기자

나비기금은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에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전시 성폭력 피해자와 분쟁 지역 피해아동을 돕기 위해 만든 기금이다. 김 할머니는 2015년 평생 모은 돈 5000만원을 나비기금에 냈다. 나비기금은 ‘김복동 장학기금’을 만들었다.

나비기금은 전 세계에서 전쟁과 폭력 사태로 고통 받는 여성들을 돕고 있다. 나비기금은 아프리카 콩고 내전으로 성폭력의 고통을 받은 마시카에게 도움을 주었다.

마시카는 1998년 당시 9살, 13살의 딸들과 함께 콩고 내전 중 군인들로부터 강간당했다. 남편은 살해당했다. 그러나 마시카는 고통 속에 주저앉지 않았다. 강간 피해 여성들의 피신처인 ‘경청의 집’을 열고 6000명의 강간 피해 여성들을 지원했다. 강제 임신으로 태어난 고아들을 입양해 보살피고 있다.

경남 양산 출신의 김복동 할머니는 14살에 일본군에 끌려갔다. 8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고통을 겪었다. 김 할머니는 자신의 아픔을 승화시켜 여성 인권 운동을 향해 나아갔다. 세계 곳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와 일본이 맺은 한일 위안부 합의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치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을 촉구했다.

문재인 정부 시기 만들어진 한일위안부 합의 검토 TF(태스크포스)는 2017년 12월 27일 보고서를 통해 한일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와의 소통이 부족했다고 결론 내렸다. 또 국내외 소녀상, 위안부 표현, 위안부 관련 단체 설득 등 비공개 부분이 있었다며 한일 간 비공개 합의의 존재를 인정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1월 21일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치된 화해치유재단의 허가를 취소했다.

김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재일조선학교 학생들도 도왔다. 재일조선학교 학생 6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김동희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관장은 “김복동 할머니는 자신이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재일 동포 학생들도 외국에서 어려움을 겪기에 그들을 도왔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김 할머니는 피해자지만 이를 넘어 여성인권 운동가로서 아픔이 있는 곳곳에서 함께 연대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평화를 외쳤다”며 “할머니가 이러한 인권 활동을 한 것은 자신이 피해자였고 아픔이 있었고 약자였기 때문이었다. 약자의 아픔을 알았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고 이들이 용기를 갖도록 힘을 줬다”고 했다.

이어 “일본 정부의 일본군에 의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전쟁범죄 인정, 이에 따른 법적 배상이 이뤄져야한다”며 “이것은 지금도 전시 하에 여성 폭력을 당한 전세계 피해자들에게도 중요한 과제다. 가해자인 전범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이뤄져 역사 교과서에 기록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역할이 소극적이라며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관장은 “정부가 자주적 외교를 통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생전에 평화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여성들이 얼마나 가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소원은 남북의 통일이 이뤄지고 평화의 나라, 이산가족이 없는 나라, 우리와 같은 피해자를 두 번 다시 만들어 내지 않는 나라가 되어 자손들이 안심하고 가슴 펴고 사는 겁니다."

9일 고 김복동 할머니 추모와 기억전 개막식이 이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박물관)’에서 열렸다. / 사진=이준영 기자
9일 고 김복동 할머니 추모와 기억전 개막식이 이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박물관)’에서 열렸다. 생전 김 할머니 발언. / 사진=이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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