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전문가들, 개성공단기업인 방북 승인·비핵화 방안 제시 등 자주적 역할 필요 의견
“北 체제보장 요구 등 북미 협상 ‘새 판’짜는 상황서 한국 역할 제한적” 지적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북미 간 비핵화 협상 교착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운신의 폭이 줄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당사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개성공단기업인 방북 승인, 비핵화 방안 제시 등 자주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북미 비핵화 협상은 지난 2월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비핵화와 상응조치 방안에 대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끝난 후 교착 상태를 보이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을 진행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이후 4차 남북정상회담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북한에 보내는 비공개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처럼 한국 정부는 자신의 역할을 통해 북미 교착을 해결해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북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과거와 같이 소극적 입장으로 나설 경우 북미 교착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왔다. 단순히 북미 사이에서 양측의 말을 전하거나 북한으로 하여금 비핵화 의지를 다시 밝히게 하는 수준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4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은 의미가 있다. 다만 사전에 북한이 짜는 비핵화 틀과 전략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또 미국을 어떻게 설득하거나 접근할 지에 대해 사전에 전략적 입장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며 “즉 한국이 어떠한 공간을 만들지 전략을 가지고 남북정상회담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정부가 그런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홍 실장은 “우리 정부는 작년처럼 단순히 북미 교착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소통 역할을 반복적으로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북한 입장을 확인하고 비핵화 의지를 다시 미국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하면 안 된다. 이러한 수준의 역할은 작년에는 통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 않다”며 “북한도 한국이 작년과 같이 소극적 입장을 취하면 이번에는 받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하노이 회담 이후 미국의 전향적 변화를 보여주는 메시지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한국이 그런 전향적 메시지를 받아온 것이 아니라면 남북정상회담을 해봐야 북한이 호응할 상황은 아니다”고 진단했다.

홍 실장은 성공적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한국 정부가 개성공단기업인 방북 승인, 남북철도협력 사업 적극 추진 등 자주적 역할을 통해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는 당사자로서 미국과 상관없이 한국 정부의 역할 공간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없으면 북한도 쉽게 만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며 “ 개성공단·금강산·남북철도 사업, 선도적인 대북 인도적 지원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미국과 상관없이 최대한 할 수 있는 부분까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올해 남북 고위급회담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남북 간 자주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공간을 열고 북한과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이 생각하는 비핵화 로드맵과 방법을 설명하고 수용하라는 설득 등 당사자로서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북미 쌍방 수용 가능한 비핵화·상응조치 합의 초안 제시해야”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도 위축된 남북관계의 자주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지난달 30일 국회서 열린 토론회에서 “위축된 남북관계의 자유성을 넓혀야 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틀 속에서 남북이 할 수 있는 교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방북 승인 여부와 관련해 “정부 정책이 과감해지느냐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개성공단 기업인 방북은 유엔 안보리 제재 위반도 아닌데 못 보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이에 대해 미국이 곤란해 한다면 그것은 미국의 이야기다. 우리 기업인들이 개성공단에 가서 자신들의 설비를 보는 것이 미국에 무슨 불이익을 주나”라며 “민간에서 정부에 강하게 교류협력을 요청하고 또 강하게 항의하면서 남북관계 협력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남북관계 정책에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달 30일 개성공단 기업인들은 자산 점검을 위한 9차 방북 승인을 신청했다. 당시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장은 “시설점검을 위한 우리의 방북은 대북제재와 상관없다”며 “정부가 대북 제재와 무관한 공단 기업인들의 공단 방문을 지금껏 허락하지 않는 것은 미국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승인을 결단해야한다”고 말했다.

홍민 실장은 “개성공단 방북 승인은 당사자 역할로서 필요하다. 새 통일부 장관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비핵화와 상응 조치 합의안‘ 초안을 만들어 북미에 제시하고 협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현재 미국과 북한 모두 쌍방이 수용할 수 있는 ‘비핵화·상응조치’ 합의안 초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구체적인 비핵화·상응조치 합의안 초안을 만들어 먼저 미국과 긴밀히 협의해 한미 공동의 합의안 초안을 완성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 정부가 이를 대북 특사 파견이나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김 위원장에게 전달해야 한다. 북한도 수용할 수 있는 남북미 공동 합의안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본부장은 “문 대통령은 북미 핵 합의안 초안을 김 위원장에게 제시하면서 지나치게 점진적인 접근으로는 비핵화 과정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고, 이 경우 미국의 정권교체로 북미 수교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협상이 중단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며 “북한이 취할 여러 개의 비핵화 조치를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조기에 비핵화를 마치고 북미 수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김 위원장을 적극 설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 본부장은 한국 정부가 비핵화 과정이 장기화할 경우 중간에 중단되지 않도록 북한과 미국 모두를 구속하는 합의를 올해 안에 도출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북미 협상이 새 국면을 맞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북미 교착상황 해소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북미간 새판 짜야할 상황, 냉각기 필요” 의견도···비건·볼턴 잇단 방한 주목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지금은 미국이 빅딜안을 내면서 잠정 합의안이 깨지고 새로운 셈법을 북한이 요구하는 과정에 있다”며 “근본적으로 판 자체가 새롭게 짜져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지금 상황은 한국 정부의 적극적 역할 변화 정도로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최근 북한이 기존의 제재완화에서 체제보장을 새롭게 요구했다. 북한은 초기에는 종전선언 얘기를 하다가 두 번째 북미정상회담에서 제재완화를 요구했다. 이제는 다시 체제안전 보장을 요구하는 쪽으로 돌아갔다”며 “지금 북한은 과거와 다른 형식의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또 한국이 중간에서 중재안을 내도 미국이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했다.

이어 “미국이 협상의 판을 깼다.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안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안을 들고 나와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도 그럴 생각이 없는 거 같다. 당분간 냉각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외교부에 따르면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오는 8~10일 한국을 방문할 것으로 전해졌다.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홍민 실장은 “비건 대표는 북한에 의사 타진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고 한국으로 오는 것으로 본다. 단순히 한국을 만나러 오는 개념은 아니다”고 분석했다.

일본 NHK방송에 따르면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도 이달 28일 한국을 방문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회담하는 방향을 우리 정부와 조율하고 있다. NHK는 볼턴 보좌관이 북한의 구체적 비핵화 조치 때까지 제재 유지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전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정성장 본부장은 “한국 정부는 조만간 방문할 비건 대표 및 볼턴 보좌관과 함께 북미가 비핵화의 어떤 단계에서 어떤 상응조치를 취할지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러한 큰 그림을 아직 그리지 못한 상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