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현충원서 99주기 추모식 열려···안중근 하얼빈 의거 및 독립운동 지원, 동포 경제적 삶 개선 등에 크게 기여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탕! 탕! 탕!’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에 앞장 선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격에 가슴을 부여쥐고 쓰러졌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막후 지원한 이가 있다. 민족자본가 최재형 선생이다.

5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최재형 선생 순국 99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 사진=이준영 기자
5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최재형 선생 순국 99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 사진=이준영 기자

5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최재형 선생 순국 99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국가보훈처가 후원하고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가 주최했다. 최재형 선생의 손자인 최발렌틴 러시아독립유공자후손협회 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최재형 선생은 일군 엄청난 부를 혼자만의 이익과 사리사욕으로 챙기지 않았다. 엄청난 돈으로 독립운동과 재러 동포들의 삶 개선을 위해 나눔을 실천해 기업가로서의 책임을 보여줬다”며 “조국에서 버려진 난민이었으나 조국과 동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기업가는 돈을 이렇게 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최재형 선생은 9세 때 가족들과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러시아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다. 이후 어렵게 큰 재산을 모았다. 재러 동포 가운데 가장 큰 부자였다. 최 선생은 모든 돈을 독립운동과 재러 동포들의 삶에 쏟았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다. 성공한 민족자본가로서 조국과 동포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

◇ 러시아로 이주해 자수성가하다

최재형 선생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慶源)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부친 최흥백은 가난한 소작인이었다. 선생의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1869년 가을 부친 최흥백은 부인을 고향에 남겨둔 채 최재형 선생과 형을 데리고 훈춘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가 지신허(地新墟)라는 한인마을로 이주했다. 1869년 당시 두만강 국경의 육진지방은 대흉년으로 많은 이들이 굶어 죽었다.

지신허 마을로 이주한 2년 후 선생은 11살의 나이에 가출했다. 이후 러시아 상선에 들어가 일했다. 선장의 부인으로부터 러시아어, 러시아 고전문학 등을 배웠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페트로그라드를 두 번 왕복하는 등 여러 나라의 문물들을 접하며 세상을 배웠다.

최재형 선생은 집을 떠난 지 10년 만에 가족들을 찾았다. 몇 달 후 러시아 정부는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라즈돌리노예, 자나드로브카, 바라바쉬, 슬라뱡카, 노보키예프스크를 거쳐 두만강 하구 국경지대인 크라스노예 셀로에 이르는 군용도로 건설을 시작했다. 당시 주변 한인마을의 한인농민들이 부역에 동원됐다. 러시아어를 할 수 있었던 선생은 도로건설을 담당하는 철도도로건설국의 통역으로 일했다.

선생은 러시아 관리들과 부역에 동원된 한인들 간에 중재자 역할을 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은 통역으로 일하면서 특히 불행하고 차별받는 처지에 있음에도 러시아어를 몰라 불평불만을 해소할 수 없었던 한인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한인 동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도헌’이 돼 한인 사회를 이끌다···사업가로 모은 돈, 한인 교육 사업에 지원

러시아 정부는 점점 늘어나는 한인 이주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1880년대 후반부터 도헌(都憲), 사헌(社憲)제를 도입해 자치제를 허용했다. 러시아정부는 연해주 남부 러시아, 중국, 조선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몇 개의 한인마을들을 합해 연추읍을 만들어 책임자인 도헌이 행정을 관리하도록 했다. 도헌은 행정 담당자로서 읍회의 의장을 겸했다. 3년마다 읍회에서 선출했다. 도헌은 읍민들 간 분쟁이나 농민과 지주간 분쟁을 조정했다. 한인학교를 유지했다.

/ 출처=국가보훈처
/ 출처=국가보훈처

1893년 최재형 선생은 도헌에 선출됐다. 이는 선생이 러시아정부의 신뢰와 한인 사회에서의 존경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생은 도헌으로서 한인자녀들을 위한 교육 사업에 집중했다. 선생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학교 설립을 위해 힘썼다. 선생은 연추 니콜라예프스코예 소학교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2000루블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선생의 장학금을 받고 사범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이들이 졸업 후 모교의 교사로 왔다. 선생은 연추에 우신학교(又新學校)를 세워 교장으로도 지냈다.

선생은 각 촌락마다 러시아정교회와 한인소학교가 하나씩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선생은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재러 한인들은 선생의 자금모집을 적극 도왔다. 이에 1890년대 말 연해주지역의 32개 한인마을에 있었던 러시아 소학교들은 한인 농민들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최재형 선생은 자신의 봉급 3000원을 전부 은행에 맡기고 그 이자로 매년 1명을 페테르부르그 등 러시아 도시의 학교로 유학 보냈다. 장학생 가운데는 김아파나시, 김미하일, 한명세, 오하묵, 최고려, 박일리야 등 저명한 사회, 정치적 지도자가 많이 됐다.

선생이 이렇게 교육사업을 지원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사업가로서 모은 재산 덕분이었다. 선생은 연추의 러시아 군대에 소고기를 납품했다. 선생은 러시아 군대와 계약해 소고기와 건축자재 등을 공급했다. 선생은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와 연추에서 가옥임대업도 했다.

선생은 재러 한인사회를 위한 교육과 경제적 삶 개선을 지원하기 위해 당시 큰 부자였던 한인사업가들과도 힘을 모았다. 엘리세이 루키치(한익성)와 그의 동생 한 바실리 루키치, 김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최 니콜라이 루키치(최봉준) 등이었다.

보훈처에 따르면 최 루키치 니콜라예치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군대에 소고기를 납품해 돈을 모았다. 이들은 협력하며 한인사회가 필요로 하는 경비를 지원했다.

◇ 자신의 재산을 항일 의병 투쟁에 지원···독립운동 지도자가 되다

선생은 자신의 재산을 항일 의병 투쟁을 위해 기꺼이 지원했다. 버려지고 떠나온 조국이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선생은 러일전쟁 후 일본의 한반도정책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동경으로 건너갔다. 6개월 만에 연추로 돌아온 선생은 항일 투쟁을 위한 의병을 조직했다.

선생은 전(前)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과 노보키예프스크에 의병본부를 만들었다. 1908년 봄에는 안중근(安重根), 김기룡(金基龍), 엄인섭(嚴仁燮) 등이 다른 동지들과 함께 선생의 의병본부에 참여했다.

선생은 이들과 1908년 4월 항일조직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했다. 선생은 동의회 총장이 됐다. 동의회 취지서는 다음과 같다.

“만약 조국이 멸망하고 형제가 없어지면 우리는 뿌리없는 부평이라 다시 어디로 돌아가겠는가....(중략) 우리도 철환(鐵丸)을 피치 말고 앞으로 나아가서 붉은 피로 독립기를 크게 쓰고 동심동력하야 성명을 동맹하기로 청천백일에 증명하노니 슬프다 동지제군이여.”

선생은 동의회의 군자금으로 1만 3000루블의 거금을 지원했다.

동의회 소속 의병부대는 1908년 7월부터 9월 사이 함경도 국경지대로 나아가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선생은 1909년 1월 31일 신문사인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막후 지원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도 막후 지원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러 가기 전 최재형 선생의 집에 머물며 사격연습을 했다. 선생은 안중근 의사에게 여비도 지원했다.

최재형 선생의 자녀인 최 올가는 안 의사가 자신의 집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1912년 안 의사의 부인과 어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우수리스크에 있는 선생의 집을 방문했다고 한다.

안 의사는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는 순간 권총을 쐈다. 3발을 명중시켰다. 이토는 죽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어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 등도 공격해 중경상을 입혔다. 안 의사는 그 자리에서 “대한 만세”를 외치고 체포됐다.

◇ 한인 삶 개선과 교육 지원하는 권업회 만들다

선생은 1911년 한인의 실업과 교육을 지원할 목적으로 권업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됐다. 일본 외무상 모토노 타로는 1915년 8월 러시아 당국에 보낸 메모에서 최재형, 이동휘, 이상설, 이동녕, 이종호, 이강, 이범윤, 정재관 등 28명의 한인지도자들을 일본 당국에 넘겨주거나 시베리아 오지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일제는 최재형 선생이 권업회 창건자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1만 5000루블의 기금을 모았다는 혐의를 적시했다.

결국 선생은 1916년 7월 또다시 러시아 당국에 체포됐다. 다행히 선생은 첫째 사위 김 야곱 안드레예치의 주선으로 석방됐다.

선생은 러시아 한인들의 중앙기구였던 전로한족중앙총회가 3․1운동을 전후해 확대 개편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외교부장에 선출됐다.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임됐으나 러시아에서 활동하기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 1920년 4월 참변으로 순국···“내가 숨으면 일제는 가족들에 복수할 것”

1920년 4월 4일 일본군은 러시아혁명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스파스크, 포셋트 등지의 러시아혁명 세력과 한인들을 습격했다. 일제는 이 지역의 한인들에게 체포, 방화, 학살을 자행했다. 4월 참변이다.

4월 4일 선생의 부인과 딸들은 선생에게 피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생은 거절했다.

“만약 내가 숨으면 일본인들이 잔인하게 너희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나는 일본인들의 기질을 안다. 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학대하는지!”

다음날 아침 선생은 일본군에 체포됐다. 선생은 곧 재판 없이 총살됐다.

뒤에 남은 선생의 부인과 10명의 자녀도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5일 선생의 99주기 추모식에서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최재형 선생은 자신을 살리고 동포들의 삶을 살리고 민족 공동체를 살리고자 했다”며 “선생의 정신은 ‘책임의 정신’이었다.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이날 손자인 최발렌틴씨는 이렇게 말했다.

“최재형은 재러 한인들을 위해 열심히 활동해 한인들이 일자리를 얻고 부유하게 살도록 했다. 최재형 선생은 항일의병 투쟁 조직을 만들고 본인도 직접 참가했다. 하늘에 있는 최재형 선생과 자식들이 오늘의 추모식을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함께 할 것이다.”

5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최재형 선생 순국 99주기 추모식에서 선생의 손자 최 발렌틴이 발언하고 있다. / 사진=이준영 기자
5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최재형 선생 순국 99주기 추모식에서 선생의 손자 최발렌틴씨가 발언하고 있다. / 사진=이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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