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정식 개관하는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50년 전 ‘울림’ 그대로 담아
오동진 부관장 “양극화·비정규직 고통받는 젊은이들에 새 희망 전해주고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 항거한 전태일)

“전태일의 사랑·연대·희망의 정신은 2019년 현재의 젊은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경제는 발전했으나 빈부격차는 커졌고 경쟁 심화로 이기주의가 만연됐다. 취업난, 비정규직으로 좌절하는 이들이 곳곳에 있다. 전태일기념관을 통해 이들에게 전태일의 사랑, 연대, 희망의 정신을 전하고 싶다.” (2019년 3월 평화시장 옆 전태일기념관에서 오동진 부관장)

3월 22일 서울시 중구 청계천로 평화시장 앞 전태일 분신 현장. / 사진=이준영 기자
3월 22일 서울시 중구 청계천로 평화시장 앞 전태일 분신 현장. / 사진=이준영 기자

지난 22일 서울 중구 청계천로 평화시장에는 옷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외국인들도 평화시장 곳곳을 돌아다녔다. 평화시장에서 동대문 방향을 보니 옷을 파는 고층 빌딩들이 삐죽 솟아있었다.

평화시장은 어느 시장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여기는 특별한 게 있다. 평화시장 앞 길바닥에는 ‘전태일 분신 현장: 1970.11.13. 전태일 여기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다’고 적힌 동판이 길바닥에 박혀있다. 그 동판 앞 다리에는 스물세 나이의 전태일 동상이 서 있다. 전태일 동상은 평화시장 앞에서 여전히 노동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화시장에서 청계천을 따라 을지로 방향으로 걸었다. 15분을 걸으니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서울 중구 청계천로 105)이 보였다.

전태일기념관은 전태일 분신 항거 49주년을 앞두고 오는 4월 중 정식 개관한다. 지금은 시민들에게 우선 개방하고 있다. 전태일기념관은 국내 최초의 노동자 기념관이다. 서울시가 만들었다. 서울시는 이 곳을 ‘노동존중’ 상징 시설로 만들 계획이다.

지상 6층 규모의 전태일기념관은 2층에 공연장, 3층에 전시관이 마련됐다. 4~6층은 노동허브와 서울노동권익센터 등이 들어선다. 

전시관에는 전태일 열사가 사망한 후 어머니 이소선씨가 전태일의 꿈을 이어받아 청계피복노동조합 창립 등  노동 운동의 역사도 담았다. 전태일의 분신 항거가 노동자에 미친 영향과 각성 그로인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역사도 보여준다.

49년 전 자신과 동료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전태일은 자신을 불태웠다. 1970년 전태일의 정신은 2019년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전태일의 사랑·연대·희망정신, 젊은이들에 전달할 것

기념관에서 오동진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부관장을 만났다. 오 부관장은 “지금도 여전히 암울한 면이 있다. 경제는 발전했으나 빈부격차는 여전하다. 취업난과 비정규직 문제도 심각하다”면서 “이런 시기에는 전태일의 내면에 있는 사랑, 연대, 희망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기념관 조성 취지를 설명했다. 

지난 22일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에서 오동진 부관장을 만났다. / 사진=권태현PD
지난 22일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에서 오동진 부관장을 만났다. / 사진=권태현PD

오 부관장은 “전태일은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했다. 당시 피복 공장에서 고통 받던 어린 노동자들인 ‘시다’(보조원)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면서 “이처럼 어려운 사람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굉장히 필요하다. 특히 젊은 청년이나 학생들에게 전태일의 사랑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전태일과 어린 시다들은 하루 14시간 이상 일했다. 한 달에 휴일은 이틀뿐이었다. 생리 휴가는 있어본 일이 없었다. 이들은 1.5미터 높이 천장의 작업현장에서 쭈그리고 앉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했다. 공장 비성수기가 되면 이들은 대량 해고됐다. 시다들은 가정이 어려워 학교를 가지 못한 12~15살의 소녀들이었다. 햇볕도 없이 먼지를 마셨다. 직업병인 폐병에 걸리면 해고당했다.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영양실조, 소화불량, 호흡기질환, 안질 등에 시달렸다. 

전태일기념관 3층 전시관에서도 당시 열악한 노동현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태일 열사의 출생부터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한 발자취를 담은 전시관은 1960~70년대 평화시장의 옷 만드는 공장의 모습도 그대로 재현했다. 노동자들이 1.5m 높이의 천장에서 쭈그리고 일해야 했던 현장이다. 기자가 직접 체험해보니 비좁고 답답했다.

전태일전시관 안에 재현된 1970년대 평화시장의 피복공장 작업 현장. / 사진=권태현PD
서울 중구 청계천로에 마련된 전태일전시관 안에 재현된 1970년대 평화시장의 피복공장 작업 현장. / 사진=권태현PD

전태일은 제대로 점심도 못 먹는 시다들에게 자신의 차비로 풀빵을 사다주고 자신은 집까지 두 시간 이상 걸어갔다. 열악한 노동현실에 힘들어하는 동료 노동자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전태일이 쓴 다음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조금만 더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오 부관장은 현재의 노동자들과 젊은이들에게 연대의 정신도 필요하다고 했다.  경쟁의 시대라 이기주의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끊임없이 연대하려고 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바보회 조직도 만들고 삼동친목회도 만들었다. 주변 사람과 함께하려는 연대 정신이 있었다.

오 부관장은 “지금도 여전히 혼자선 살 수 없다. 현재에도 함께 살려는 연대 정신이 굉장히 필요하다”며 “전태일이 가지고 있던 사랑과 연대 정신을 되살리고 싶다. 이는 기념관 설립의 주요 취지다”고 말했다.

오 부관장은 전태일의 좌절하지 않는 희망의 정신도 강조했다.

“전태일은 아무리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았다. 물론 처참한 노동 조건과 노동자들의 힘으로 개선되기 어려웠던 현실이 힘들어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대안을 찾아 실천하고 연구했다. 모범업체인 태일피복을 만들겠다는 꿈도 가졌다. 전태일은 처참한 노동 조건의 현실을 극복하고 개선하기 위해 별 방법을 다 찾았다. 전태일 정신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미래 세대에 전해주고 싶다.”

전태일과 삼동회 동지들이 만들어 배포한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 / 자료=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전시관
전태일과 삼동회 동지들이 만들어 배포한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 / 자료=전태일전시관

전태일은 처참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탄원서도 썼다. 신문사를 찾아가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일일히 조사해 근로감독관에게 찾아가기도 했다. 전태일은 힘들고 괴롭고 절망적이라도 이것을 이겨나갈 수 있다는 희망과 낙관을 가졌다. 

전태일은 만들고 싶어했던 모범업체의 사업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들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한다는 데 그 취지가 있다.’

오동진 부관장은 전태일의 정신이 특히 이 시대의 젊은이와 학생들에게 전달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 부관장은 “현재 젊은 세대가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다”면서 “분신 항거 당시 전태일은 23살이었는데 젊은 청년 노동자가 (노동 현실 개선의) 원대한 꿈과 희망을 갖고 좌절하지 않고 사회를 만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의 젊은 청년들도 전태일을 알고 그 정신을 본받아 이 사회를 발전시키길 바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고 자기 희망을 가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면서 “전태일기념관은 종로 3가역, 종각역, 을지로 3가역에서 걸어올 수 있다. 조직 노동자와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 노동자, 개별 노동자들이 기념관에 와서 전태일의 노동자 정신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태일기념관은 서울시와 함께 학생들을 대상으로 노동인권교육에도 힘쓸 계획이다. 청년과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다. 전태일기념관은 서울시 교육청과 함께 이 공간에서 학생들에게 노동인권교육을 해 나갈 계획이다. 방문 학생들이 기념관에서 전태일 다리까지 1.4㎞ 정도 청계천을 따라가며 해설사와 함께 서울의 변천사를 알아보고, 분신 자리 현장과 전태일 동상을 마주하며 50년 전 그날의 모습을 기억해보는 과정이다. 

전태일은 분신 항거 후 동료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루어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 포기해선 안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 평전에서)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에 위치한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 사진=이준영 기자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에 위치한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입구 전경. / 사진=이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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