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발전은 여성에 달려"···농촌 자립 ·마을 교육사업 등 농촌 계몽에 전념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최용신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최용신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최용신 선생은 일제 강점기 상황에서 수탈로 피폐해진 농촌 지역 살리기에 헌신했다. 농촌 지역의 자립과 교육에 적극 나섰다. 이를 통해 민족역량을 키우려 함이었다. 선생은 특히 여성이 농촌 개혁에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세우다

최용신 선생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1909년 8월 12일 태어났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이곳은 일찍이 기독교가 들어와 교회, 학교 운영 등 서구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다. 선생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을 했다. 이에 최용신 선생은 근대교육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선생은 8세인 1916년 마을의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1918년 원산의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갔다. 졸업 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해 1928년 수석 졸업했다.

이후 선생은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선생은 농촌사회지도교육과의 황에스터(黃愛德) 교수를 만났다. 황 교수는 학생들에게 직접 농촌에 들어가 몸소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했다. 최용신 선생은 농촌계몽운동의 뜻을 확고히 하게 됐다.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선생의 관심은 중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졌다. 루씨여학교 졸업반 시절 선생이 조선일보 1928년 4월 1일자에 기고한 ‘교문에서 농촌으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 요구 한다. 여기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해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 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 중등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각각 자기의 이상을 향해 각자의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엇보다도 농촌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 내가 절실히 느끼는 바는 농촌의 발전도 구경(究竟)은 여성의 분투에 있다는 점이다. 오늘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북데기 쌓인 농촌을 위해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크게 유감이다. 문화의 눈이 구(舊)여성만 모인 농촌으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게 못한다면 이 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국가보훈처는 “최용신 선생은 여성도 남성과 같이 사회개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신여성이야말로 가정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농촌에 뛰어들어 문맹퇴치와 생활개선을 주도하자고 외쳤다”며 “농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문맹 없는 농촌, 잘사는 농촌 건설이 선생의 이상이었다”고 말했다.

농촌 현장으로 뛰어들다

천곡학원 학생과 교사들. / 사진=국가보훈처
천곡학원 학생과 교사들. / 사진=국가보훈처

최용신 선생은 학생 신분으로 여러 농촌 현지 활동을 했다. 선생은 이를 통해 많은 갈등과 자책감을 느꼈다. 가난과 무지, 일제 강점기 수탈로 피폐해진 농촌을 본 선생은 학업을 중단했다. 최용신 선생은 1931년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천곡(泉谷, 일명 샘골)에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파견됐다. 선생은 1934년 봄까지 2년 반 동안 이곳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선생은 마을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천곡학원(샘골학원)을 인가받고 교사를 신축했다. 아동, 청년, 부녀자 등에게 야학을 통해 문맹을 퇴치하려고 노력했다.

최용신 선생은 농촌 지역의 생활개선과 농가부업을 장려하기 위해 부녀회, 청년회를 조직했다. 이를 통해 주민들 간에 믿음을 형성하고자 했다.

젊은 여성이 농촌에 와서 계몽운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위생생활, 생활개선 등을 주장하는 선생에게 현지 주민들은 책상 물림의 젊은 처녀가 무엇을 아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은 굴하지 않았다. 부임 초기부터 마을에서 운영하던 강습소를 확대 개편했다. 시간이 지나자 마을 사람들도 선생의 활동에 호응했다. 이에 작은 강습소는 ‘천곡학원’이라는 정식 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농촌 자립을 위해 헌신

선생은 농가부업, 환경개선, 저축장려 등 농촌 지역 사회 자립에도 힘썼다.

최용신 선생은 학교 주변에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했다. 감나무 등 유실수도 마을주민에게 나누어줬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 중 일부는 강습소 유지비나 농기구 구입으로 썼다.

보훈처는 “당시 마을 부녀회는 이러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부인들이 가사에 국한됐던 활동범위를 넓히며 스스로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가치관을 확립하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학용품 등을 주기 위해 밭에 나가 김을 매는 노동도 했다. 오전, 오후반 수업과 야학수업, 가정방문도 계속해 나갔다. 윤홍림(尹洪林)과 함께 농촌진흥운동에 관해 정기적으로 토론을 열었다.

선생은 1934년 3월 농촌 계몽의 새로운 연구를 위해 일본 유학을 갔다. 최용신 선생은 “이만큼 자리 잡은 샘골을 위해 지금으로부터 새로운 농촌운동의 전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좁은 문견으로는 도저히 능력이 부족하다. 만일 이대로만 간다면 곧 침체되고 말 것”이라며 “이곳을 이 땅의 농촌운동의 한 도화선으로 만들자면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선생은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업 중 선생은 별안간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게 됐다.

스물 다섯에 과로로 세상을 떠나다

선생은 병에 걸린 후 샘골로 돌아왔다. 병든 몸으로 선생은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가르치고 지도했다. 여기다 YWCA가 샘골학원 보조금 지원 중단까지 해 경제적 부담이 늘었다.

선생은 이듬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했다. 1935년 1월 23일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선생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십시오.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 마라.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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