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평양 3.1 만세운동 적극 참여···대한애국부인회 활동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 전달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했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1일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이어 그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 지사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자료=국가보훈처
안경신 선생 / 자료=국가보훈처

안경신(安敬信) 선생은 1920년 임신한 몸으로 대한광복국 총영의 동지들과 함께 평남경찰부 폭파 의거에 참여해 성공시켰다. 이 일로 안 선생은 일제에 체포됐다. 체포된 상황에서 아기를 출산했다. 안경신 선생은 1919년 평양 3.1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안경신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도 전달했다.

◇ 평양 3·1만세운동 적극 참여

안경신 선생은 평안남도 출신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을 수료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안 선생은 평양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평양의 3·1만세운동은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오후 1시에 시작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였다.

평양 3·1만세운동은 신한청년당의 선우혁과 3·1만세운동을 기획했던 이승훈이 이끌었다. 이승훈은 105인사건의 동지였던 윤원삼과 안명근 의거 당시 김구와 독립운동 동지였던 도인권에게 평양 3·1만세운동 책임을 맡겼다. 이들은 2월 12일부터 27일까지 여러 차례 만나 3·1만세운동을 준비했다. 태극기는 숭현여학교와 숭덕학교 남녀학생들을 동원해 만들었다

평양 3·1만세운동의 경비는 안정석이 맡았다. 안정석은 만세운동 직후 만들어진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 여성항일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이 됐다. 안경신은 안정석과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을 함께 했다. 안정석과 안경신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평양의 3.1만세운동은 3개의 장소에서 진행됐다. 3개의 장소에서 독립선언식을 한 후 시위행진을 하면서 합류하기로 계획했다. 평양 3.1만세운동은 3월 1일부터 9일까지 이어졌다.

이에 평양 경찰은 3월 2일 오후 1시 대거 출동해 3.1만세운동 진압에 나섰다. 3월 8일까지 검거된 인원은 400여명에 달했다. 평양의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했다. 평양의 만세운동은 3월 26일, 4월 1일 다시 시작했다.

안경신 선생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서문동에서 적극 참가했다. 평양 서문동은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남산현교회가 있는 곳이다. 안경신 선생은 만세운동 가담으로 체포돼 29일간 유치됐다.

◇ 대한애국부인회 참여해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 전달

3·1만세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국내 독립운동가들도 임시정부와 연결된 많은 항일운동단체를 만들었다. 특히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항일 조직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후원했다. 안경신 선생도 항일여성운동단체에 참여해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했다.

3·1만세운동 직후 만들어진 국내 항일여성운동단체는 서울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평양에 본부를 둔 대한애국부인회, 평남 순천의 대한국민회 부인향촌단, 강서의 국민향촌회, 평양의 결백단, 평남 대동의 대한독립부인청년단, 평남 개천의 여자복음회, 서울의 독립여자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대한애국부인회는 전국적 지부를 둔 조직이었다.

평양에서는 1919년 11월 감리교의 애국부인회와 장로교의 애국부인회가 서로 통합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회원은 100여명에 달했다.

안경신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본부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했다. 안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 조직된 국민향촌회를 재조직한 강서지회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안경신 선생과 대한애국부인회 인사들은 회원 모집과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모집한 군자금은 안경신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강서지회는 1921년 6월 일제에 발각돼 일부 임원과 회원들이 체포됐다. 이 단체가 발각되기 전까지 모집한 군자금은 2400여 원에 달했다. 당시 안 선생은 체포되지 않았다.

◇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과 평남경찰부 폭파 의거 참여

대한애국부인회가 일제에 발각된 후 안경신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갔다. 선생은 1920년에 조직된 대한광복군 총영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한광복군 총영은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이었다.

당시 안경신 선생은 다음과 말했다고 한다.

“나는 3.1운동 때도 참여했지만 그 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단결과 힘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투탄(投彈), 자살(刺殺), 사살(射殺)같은 일회적 효과가 크게 주요할 것으로 믿고 있다.”

임시정부는 1920년 7월 26일 군무부 직할의 대한광복군사령부 설치안을 의결하고 규정을 제정해 8월 1일 시행을 공포했다. 광복군사령부 편제가 완성되고 조직이 출범한 후 광복군 총영도 예하조직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군 총영의 활동 목적은 적의 통치기관 건축물 파괴, 적괴·창귀(倀鬼) 암살, 적의 행정기관의 문란 등이었다. 광복군사령부는 만주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는 독립전쟁, 광복군 총영은 국내 작탄(炸彈) 투쟁이 주 목적이었다. 작탄은 손으로 던져서 터뜨리는 폭탄을 말한다.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 7~8월 중 미국 의원 시찰단이 필리핀, 중국, 일본 등을 시찰 방문하는데 한반도도 그 여정에 포함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임시정부는 이를 기회로 세계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려고 계획했다.

임시정부는 외교적 노력과 동시에 국내에서 작탄 거사를 통해 민심을 일으켜 대대적 시위를 촉발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미국과 세계 여론에 한국독립을 호소하자는 계획이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미국의원단의 상해 체류 시 그들과 만나 선전물을 전달하고 가두시위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동시에 군부를 통해 광복군 총영에 국내 폭탄 거사 실행 명령을 내렸다.

이에 광복군 총영은 서울, 평양, 신의주 등 세 도시에서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계획했다. 먼저 대원 13명을 선발해 3개 대로 나누어 비밀리에 파견했다.

결사대 제1대는 김영철, 김성택, 김최명이었다. 제2대는 장덕진, 박태열, 문일민, 우덕선, 안경신이었다. 제3대는 이학필, 임용일, 김응식 등이었다. 제1대는 서울, 제2대는 평양,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 방면의 거사를 맡았다. 

8월 23일 제1대의 김최명은 종로경찰서, 김영철은 이완용의 집, 24일에는 김성택이 서울역에 각각 투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거사 직전인 8월 21일 중국 요리집 아서원 6호실에서 성공을 다짐하는 자리를 갖던 중 일경에게 전원 체포됐다. 이들 모두 최종 판결에서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이들은 1929년에 만기 출옥했다.

안경신 선생이 속한 제2대는 의용단 평양지단과 협조 하에 평양 시내의 일제 통치기관을 투탄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이들은 2조로 나누어 제1조는 벽동 읍내로 들어가 친일파 황계익을 처단했다. 경고문을 발포하고 읍민들에게 황계익의 죄상을 밝혔다. 제2조는 서하면으로 가서 파출소를 공격하고 집결지로 귀환했다. 8월 1일 평양성내 잠입에 성공했다. 이곳에서 의용단 평양지단과 만나 계획을 진행했다. 안경신 선생은 평양까지 폭탄을 비밀리에 반입했다.

8월 3일 밤 9시 의용단과 광복단 대원들은 3개조로 나누어 거사를 시작했다. 안경신 선생도 이 때 합류했다. 제1조의 목표물은 평남도청이었다. 의용단원 김예진과 17세의 숭실중학교 2학년생 김효록이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터지지 않아 문일민과 우덕선이 다시 폭탄을 던지자 신축건물인 제3부(평남경찰부)의 담장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부서졌다. 일경 2명이 폭사했다.

제2조는 장덕진, 박태열, 안경신이었다. 이들은 평양경찰서 앞에 도착해서 도화선에 불을 붙였는데 빗물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았다. 제3조에서는 의용단원 여행렬과 표영준이 평양부청에 투탄했는데 이것도 불발했다. 

평양경찰서 폭파에 실패한 박태열과 장덕진은 황해도 해주로 가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려 했다. 그러나 엄중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은 서간도로 돌아갔다. 평남경찰부에 폭탄을 던진 문일민과 우덕선도 무사히 돌아갔다.

당시 안경신 선생은 임신 상태였다. 안 선생은 대원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어느 참외밭으로 피신했다. 안 선생은 기자림에서 문현철을 만나 폭탄 한 개를 건네받고 거사의 기회를 다시 노렸다. 그러나 일경의 경비가 심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피신했다. 안 선생은 함경남도 이원군 남면 호상리의 최용주 집으로 몸을 숨겼다.

결사대 제3대는 평북 신의주와 선천방면의 거사를 실행했다. 박치의가 던진 폭탄으로 선천경찰서가 폭파됐다. 박치의는 체포돼 사형판결을 받았다. 1921년 9월 30일 평양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박치의의 일가 친척과 교회 목사 등 20여명의 주민도 거사 모의 및 협조 혐의로 체포됐다. 이 중 14명이 평양복심법원에서 2년~1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안경신 선생은 대동경찰서에 의해 1921년 3월 20일 체포됐다. 안 선생은 원산을 거쳐 25일에 평양으로 압송됐다. 다음날인 26일 아기를 출산했다. 안 선생은 태어난지 열흘 정도 된 아기를 품에 안고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됐다.

안경신 선생은 평양지방법원 재판정에서 검사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다. 안 선생은 무죄를 주장하며 1심 판결을 불복하고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했다. 안 선생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평양감옥에 수감된 지 3개월 후 안 선생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안 선생은 1927년 8년 만에 가출옥했다. 평양 신양리에 살던 오빠 안세균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선생의 아들은 눈을 뜨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안 선생의 동지였던 장덕진은 1924년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중국인과 시비가 붙어 중상을 당한 후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안 선생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 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 씨의 비명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 됩니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안경신 선생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철저했다.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폭탄 거사에 과감하게 참여했다”며 “안경신 선생의 과감한 폭탄거사 투쟁은 한국여성의 강력한 독립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안경신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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