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한인 총대표회의서 결의문 작성 주도···‘민족경제 살리기’ 위해 유한양행 설립
유한양행 해외지사 활용 독립운동 모색···1941년부터 특수공작대서 활약하기도

 

2019년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일본제국주의 억압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지 100년이 흘렀지만 아직 그 정신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생생히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운동사(史)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 중에는 기업인 출신들도 많았다. 민족자본가로 통하는 이들은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거나 물질적 재원을 지원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들이 직접 창립하거나 기틀을 마련한 기업들은 지금도 대한민국 경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사저널e는 창간 4주년을 맞아 100년 전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 족적을 남긴 기업인들의 면면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소년병 시절 유일한 박사의 모습(앞줄 맨 오른쪽). / 사진=유한양행
소년병 시절 유일한 박사의 모습(앞줄 맨 오른쪽). / 사진=유한양행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설립한 고(故) 유일한 박사(1895년~1971년)는 후대에 일반인들에게도 성공한 기업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유 박사는 기업인이기 전에 독립운동을 실천하고 지원한 인물이다. 그가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행적은 여러 문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던 지식인이 민족 자립을 위한 독립운동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지난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 박사는 11살 때인 1905년 미국으로 유학, 네브래스카주 커니에 정착했다. 유 박사는 1909년 박용만이 미주지역에서 최초로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교, 오전에는 농장에서 학비를 벌고 하오에는 학과 공부와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학교에서 수학한 3년 간 생활에서 형성된 유 박사의 민족의식과 자주독립 사상은 향후 그가 전개한 독립운동 원천이었고 기업경영 지표로 작용했다. 

헤스팅스 고교를 거쳐 미시간주립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지난 1919년 유 박사는 한인총대표회의에 대의원 자격으로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임병직 등과 함께 참가했다. 유 박사 평전에 따르면 한인 총대표회의는 유 박사는 물론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행사였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한 달 여가 지난 1919년 4월 10일, 유 박사는 중국 상하이 현순 목사의 중국식 가옥에서 이동녕, 여윤형, 조동호 등 29명의 임시의정원 의원들과 제1회 의정원 회의를 열고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이어 4월 13일 이들은 임시정부가 한국의 정통 정부임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유 박사가 활약한 한인 총대표회의는 바로 그 다음 날인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한인 대표 150여명이 다수 미국인들과 참석한 가운데, 필라델피아시 17가와 델란시가 교차점에 위치한 리틀 극장에서 진행됐다. 참고로 유 박사 관련 전기나 독립운동 논문에서 이 대회를 ‘한인자유대회’라고 칭하기도 한다.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총대표회의를 마친 참석자들이 행진하는 모습. / 사진=유한양행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총대표회의를 마친 참석자들이 행진하는 모습. / 사진=유한양행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가 거의 모두 참석한 한인 총대표회의에 당시 24세였던 유 박사도 당당히 재미한인 대표로 참여했다. 특히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표명하는 결의문’ 기초작성위원회 대의원으로 그가 활약한 것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 결의문 작성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영익 교수의 ‘3·1운동 후 서재필의 신대한 건국 구상’이라는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참고로, 이 결의안에 대해 대회 참가자들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전개했는지를 짚고 넘어가자. 우선 이 결의안 작성 책임을 맡았던 유일한의 경우 그가 이 결의안 기초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된 것은 미시건대 입실란티 법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유일한이 대회 참가자들 가운데 법률 지식이 가장 풍부한 인재라고 판단됐기 때문에 약관 24세인 그에게 결의안 작성의 중책이 맡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은 이 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했을 때 자기가 이끈 기초위원회 임무가 얼마나 중요하며 또 그 책무가 얼마나 버거운 것이었는지를 실토했다.’ 

미시건대학에서 상과를 전공한 유 박사가 법학을 공부했다는 점은 다른 기록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다. 미시건대학에서 부전공 형식으로 법학을 공부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판단된다. 한국을 떠나 타지인 미국에서 공부한 유 박사의 지식이 조국 독립운동에 기여를 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 박사는 당시 결의문 작성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우리는 이 결의안을 기초하면서 우리 실력으로는 만족스럽게 완수할 수 없는 힘겨운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것을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기본 원칙을 처음으로 문장화해 봤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이 안정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조국에서 대규모 의회를 개최할 때 그 회의에 참석하게 될 많은 석학들이 훌륭한 헌법을 제정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유능한 인재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실력으로는 우리의 ‘목표와 열망’을 완벽하게 표출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초안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것입니다.” 

유 박사가 참여한 위원회가 작성한 결의문은 향후 제정될 대한민국 헌법의 대강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서재필 선생도 이 작업 중요성을 인식하고 결의안이 준 헌법적 성격을 지닌 문건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제헌의회를 구성, 헌법을 제정할 때 참고하게 될 중요한 문헌이라고 판단했을 것으로 유 박사 평전은 전하고 있다. 결국 이승만 박사와 대한인국민회의 대표 등 참가자 일부가 특별모임을 갖고 초안을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유 박사가 주도한 결의안은 한인 총대표회의에서 의결됐다.  

결의문에는 민주주의의 대의 원칙과 ▲정부 형태 ▲입법의원들 선출과 권한 ▲행정부 구성과 대통령 권한 ▲자유무역 원칙 ▲민중 교육 필요성 ▲신앙의 자유 ▲민중 건강 증진 ▲합리적 경제정책 ▲언론 출판의 자유 등을 담고 있었다.

맹호군 창설 주역인 유일한 박사의 모습. / 사진=유한양행
맹호군 창설 주역인 유일한 박사의 모습. / 사진=유한양행

유 박사는 대학을 졸업한 뒤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 여기서 마련된 자금으로 귀국했다. 그는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유 박사가 유한양행을 설립한 것은 민족의 실력 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실제 유한양행 해외지사는 전략적으로 주요한 도시에 세워졌다. 이들은 유사시 항일운동의 지하조직 핵심으로 운영할 방침이었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만주침략과 중일전쟁 등으로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유 박사는 30년대 후반부터 주로 미국에 체류했다. 이 기간 동안 수출선 다변화를 위해 유럽 및 중국 시장 개척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서도 그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 아래 항일독립전선에 역량을 집결, 광복대업을 촉성하기 위한 대일 민족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유 박사는 미군 전략정보처(OSS, 현 CIA 전신)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 조국 광복에 대한 유 박사의 투철한 의지는 1945년 ‘냅코(NAPKO) 작전계획’ 참여에서 드러난다.

OSS가 수립한 이 계획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한인을 선발, 특수공작훈련을 시킨 뒤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후방을 교란하려는 작전이었다. 1945년 1월 이 작전 계획의 핵심 요원으로 선발된 유 박사는 제1조 조장으로 임명돼 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 실행을 하지는 못했다.

1945년 IRP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유일한 박사 모습(가운데) / 사진=유한양행
1945년 IRP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유일한 박사 모습(가운데). / 사진=유한양행

유 박사는 1942년에는 전후문제 논의를 위한 IPR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LA에서 재미한인들로 무장한 맹호군 창설의 주역으로도 활동하는 등 그의 독립운동은 영역을 가리지 않았다.

이처럼 일제 시대에 그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결의문 작성에 참여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지식인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던 유 박사는 특수공작훈련을 받고 침투 명령을 기다렸던 행동파였다. 

한편 유 박사는 지난 194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유한양행을 재정비한 후 사장과 회장,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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