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판결은 아무리 중형이라도 피해자에겐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사적 복수를 말하지만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리턴 투 센더(2015)”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진=영화
사진=영화 "리턴 투 센더" 스틸 컷

조재범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체육계 전반의 문제라는 진단도 나온다. 협회–지도자–시니어– 주니어로 이어지는 철저한 위계질서, 단체 생활, 체벌과 훈육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 강간을 여성 지배 수단으로 이용하는 그릇된 남성 문화, 여성 지도자를 길러내지 않는 스포츠 정치판, 가해자에 온정적인 판례들이 결합되어 곪을 대로 곪아버린 환부가 그나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영향력 있는 여성의 폭로로 터져 나온 거다. 다행히 이번에는 관련 기관들이 발 빠르게 대책을 발표하고 언론이 2차 가해 방지를 위해 피해자 아닌 가해자 이름으로 사건을 명명하는 등, 우리 사회가 조금은 성숙한 모습이다. 이제 ‘피해자에게는 과거가 있고 가해자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성범죄에 관대한 법원이 분발할 차례다.

조재범 사건은 흔히 ‘나사르 사건’과 비교된다. 미국 미시간대 체조팀과 국가대표팀 주치의이던 래리 나사르가 30여 년간 선수들을 성폭행해 360년 형을 받은 사건이다. 하지만 미국이라고 매번 그런 속시원한 판결이 나오는 건 아니고, 성범죄는 아무리 처벌이 강력해도 피해자의 정신적 피해 복구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런 영화도 나온다. 강간 피해자가 복수하는 얘기, <리턴 투 센더>다. 성범죄 보도에는 어김없이 ‘저런 놈은 거시기를 잘라야 된다’는 댓글이 달리는데, 그런 대중 정서를 ‘진짜 보고 싶어?’ 하고 슬쩍 찔러본 듯한 영화다.

주인공 ‘미란다(로자먼드 파이크 분)’는 유능한 외과 간호사다. 이제 막 멋진 집도 샀고, 동료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다. 하지만 강간범 때문에 모든 게 무너진다. 범인은 잡혀서 실형을 받았지만 미란다는 그 트라우마로 손을 떨고 히스테리를 얻어 직장 생활이 엉망이 되고, 집이 팔리지 않아 이사도 무산된다. 괜찮은 척 일상을 살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상황. 급기야 정말로 미쳐버린 건지 미란다는 가해자에게 위문 편지를 보내고 면회를 간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그 원인을 대면하는 거라고 설명하지만 은근슬쩍 그를 유혹하는 뉘앙스다.

가해자는 거기에 낚여 출소하자마자 미란다 주변을 얼쩡거린다. 어떻게 강간을 해놓고 그 여자가 자길 좋아할 거라 믿는지 황당하다. 하지만 여자를 납치, 강간해 아내로 삼는 걸 ‘보쌈’이라는 전통 문화로 포장해온 한국인들이 할 소리는 아니다. 강간범이 섹스를 너무 잘해서 피해자가 그를 찾아다닌다는 내용의 에로 비디오는 또 얼마나 흔했나. 그런 걸 보고 자란 강간범이면 피해자가 섹스에 미쳐 자길 사랑하게 되리란 상상도 할 수 있겠지. 그리하여 주인공 집에 제발로 찾아간 범인은 끔찍한 최후를 맞았으리라고 암시가 되는데, 사실 그 결말이 좀 아쉽다.

사진=영화
사진=영화 "리턴 투 센더" 스틸 컷

<리턴 투 센더>는 작품성도, 상업성도 애매한 영화다. 로자먼드 파이크의 뛰어난 연기 덕에 간신히 망작은 면한 수준이다. 강간 이슈를 진중히 다룬 드라마라기엔 심리묘사가 얕고 비현실적이다. 기왕 비현실적으로 갔으면 화끈한 대리 만족이라도 시켜줘야 하는데, 왜인지 복수도 제대로 안 보여준다. “거기서 고어 스릴러로 바뀌어야지! 왜 피칠갑 신이 없어! 거시기를 잘라서 먹이란 말이야! 첫날밤에 물레방아 삽입하는 70년대식 연출 하지 마!” 화면을 향해 버럭 소리 지르고 싶어진다. 장르 팬으로서 하는 소리니 오해 마시라.

그런데도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하나다. 관객들이 내용에 불만족한 나머지 ‘내가 저 상황이면 어떻게 할까’ 상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상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하다 보면 미로처럼 번번이 장벽에 부딪쳐 원점으로 돌아왔다가 결국 이런 한심한 시나리오로 귀결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법은 한계가 있지만 사적 복수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시스템에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다. ‘리턴 투 현실’ 하기 위해서 잠깐 이 참담한 현실을 떠나보시길. 그리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다시 생각해보자.

글쓴이 이숙명

칼럼니스트. 영화 잡지 <프리미어>, 여성지 <엘르> <싱글즈>에서 기자로 일했다. 펴낸 책으로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어쨌거나 뉴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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