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의병 활동으로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일본군 수비대 공격, 헌병주재소 파괴
일제 군수물자 빼앗고 친일 관리 처단···일본군과 전투 중 순국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했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1일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이어 그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 지사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줬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이미지=조현경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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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식(金元植) 선생은 1907년 7월 이후 강원도 북부에서 군사를 모아 항일 의병을 지휘했다. 김 선생의 이력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선생은 화승총 등으로 무장한 20여 명의 소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다. 일제에 자진 투항하는 인사들이 속출하는 상황에도 선생은 항일활동을 이어갔다. 김 선생은 일본군 금성수비대와 전투 중 장렬하게 순국했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이후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본격화했다.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 1907년 7월 정미조약과 군대해산을 했다. 한국은 일제에 내정과 외교상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애국지사들이 분연히 일어나 항일 활동에 나섰다. 강원도 북부에서 활동한 김원식 선생도 그러한 의병장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07년 정미조약과 군대해산 이후 강원도 북부 산악지대에도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이곳의 항일의병들은 1907년 9~10월 춘천관찰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당시 평민과 향리의 후손인 박선명, 최천유, 지홍민, 최영석, 길희정 등은 분연히 일어나 춘천 인근에서 항일 활동을 했다. 강원도의 의병 피해자가 전국에서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이 곳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했다.

강원도에서 의병활동이 치열하던 시기 김원식 선생은 강원도 춘천 이북의 화천·양구·평강·김화·금성·회양·인제 등지를 무대로 항일의병 활동을 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선생은 화승총과 서양총으로 무장한 20여 명의 소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했다. 1908년 초여름 강원도 북부에서는 일제에 자진 투항하는 인사들이 잇따라 생겼다. 그러나 김 선생은 이러한 상황에도 굳은 신념으로 항일의병 활동을 이어나갔다.

김원식 선생은 강원도 북부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해 주로 야간과 새벽에 기습전을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제를 공격했다. 선생의 부대는 이강년 의병과 힘을 합쳐 연합 군사 활동을 벌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강년 의병 부대는 충청도 제천에서 일어나 강원 북부의 금강산 지역까지 올라왔다.

김 선생의 부대는 수시로 이곳저곳에서 나타나 일본군 수비대에 피해를 입혔다. 선생의 부대는 인근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고, 헌병주재소를 파괴했다. 전신선을 절단하고, 세금을 탈취하고, 일제의 군수물자를 빼앗았다. 또 친일 관리와 부호를 처단했다. 이 모든 항일 활동으로 일제의 한국 식민지배에 저항했다. 이에 김 선생은 일제로부터 주목받게 됐다.

보훈처에 따르면 1908년 6월 6일 김원식 휘하 의병으로 추정되는 20여 명의 의병부대가 화승총과 서양총으로 무장하고 금강산 이북의 흡곡현에 들어섰다. 당시 의병들은 주재소를 파괴하고, 일제의 공사 문서를 소각했다. 의병들은 일어학교를 불태우고 관리의복을 빼앗았다. 한국인 순검(순검의 명칭은 1907년 12월 27일 순사로 바뀌었다) 3인을 납치해 다음날 회양 방면으로 이동했다.

당시 이 의병들은 친일 순사 김응국과 이응섭 2인을 총살했다. 또 의병들은 6월 10일 양구군 상동면에 나타나 일진회원 1명을 체포해 산중에서 처형했다. 담배 행상을 가장한 한국인 밀정 1명도 체포해 처형했다. 이후 김원식 의병 등 강원 의병들의 항일 활동은 더 치열해졌다.

강원 북부에서만 소규모 의병 부대의 활동이 더 활발해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의병 토벌 작전에 나섰다. 일제는 인제·금성·김화·회양·통천 등 강원 북부 각군에 주둔 중인 수비대를 통해 의병을 진압하게 했다. 일본군 수비대는 인근 의병들에 대한 소탕령을 벌였다. 결국 김원식 의병장은 1908년 6월 26일 강원도 금성군 동쪽의 과반리(過半里)에서 일본군 금성수비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장렬히 순국했다.

정부는 김원식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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