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리단길 초입부터 빈 점포, 임대문의···높은 임대료에 폐업 이어져
정부 젠트리피케이션 대책 마련에도 현실에선 미봉책에 그쳐

11일 오전 이태원 경리단길 빈 점포 모습. / 사진=한다원 기자
11일 오전 이태원 경리단길 빈 점포 모습. / 사진=한다원 기자

최근 비싼 임대료 탓에 서울 삼청동, 명동, 이태원 등 이른바 ‘핫플레이스’로 불리던 거리에 빈 상점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다. 임대료 폭등으로 기존 상인들은 떠나고, 새로 들어온 상인들마저 이를 감당하지 못해 자영업 환경이 어려워지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상권 내몰림)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와 정치권, 지자체는 젠트리피케이션 관련 법률 개정 등으로 대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피해 당사자인 상인들은 전혀 나아진 게 없다며 보다 실질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1980년~1990년대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의 도시에서 일어났던 현상으로 주민·상인 등이 재개발·상업화 등으로 원래 생활하던 곳에서 내몰리는 현상을 일컫는다.

◇ ‘임대문의’ 붙은 빈 점포만 즐비···경리단길 골목은 ‘한산’

11일 오전 기자가 방문한 경리단길은 배달 차량만 왔다갔다할 정도로 한산했다. 그동안 경리단길은 다양한 볼거리와 젊은 감각으로 사람들을 모았지만, 최근 높은 임대료를 버티지 못한 상인들이 떠나면서 줄폐업이 이어지고 있는 추세다.

경리단길 초입부터 메인상가 1층의 빈 점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옮길 때마다 임대 매물로 나온 점포들이 줄을 이었다. 공실 상태가 오래돼 보이는 가게들도 많았다.

이태원 경리단길에서 부동산을 운영 중인 중개업자 박아무개씨(55)는 “예전에는 젊은 사람들이 카페 등을 차리거나 창업하기 위해 많이 찾았는데 요즘은 임대료가 많이 올라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며 “예전처럼 북적이던 경리단길로 돌아가려면 임대료가 낮아져야하는데 그럴 기미가 하나도 안보이니까 누가 오고 싶겠냐”고 말했다.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가 최근 분석한 조사에 따르면, 이태원 일대를 찾는 유동인구는 1년 새 12%나 줄어들었다. 이에 반해 이태원역 주변 임대료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10.2%나 올랐다. 이는 한국감정원이 조사한 서울시 평균(1.8%)보다 6배 가량 높은 수준이다.

아울러 부동산 중개업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메인 거리 1층 상가 임대료는 전용면적 3.3㎡당 보증금 3000~4000만원에 월세 250~300만원 수준이었으나 최근엔 200만원까지 떨어졌다. 건물주들이 뒤늦게 임대료를 내리고 있지만, 임차인들은 대부분 폐업을 준비하고 있다. 경리단길 상권 임차인들은 최근 유동인구에 비해 여전히 임대료가 높다는 입장이다.

실제 골목마다 이색적인 가게들로 거리를 채웠던 경리단길은 이제 폐허처럼 빈 점포만 가득했다. 오후 늦게 문을 여는 일부 가게를 제외하면 현재 운영하고 있는 가게인지, 빈 점포인지 헷갈릴 정도로 거리가 한산했다.

경리단길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 중인 김아무개씨(30)는 “예전에는 낮에도 외국인 관광객들, 지방에서 SNS 등을 통해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는데 요즘 낮엔 손님이 거의 없다”며 “손님들이 너무 안오니까 ‘카페를 접어야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11일 오전 이태원 경리단길 빈 점포 모습. / 사진=한다원 기자
11일 오전 이태원 경리단길 빈 점포 모습. / 사진=한다원 기자

◇ “상가임차인, 임대인 간 협의체 필요”

이러한 가운데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상가임대차)’ 개정안이 3년의 계류기간을 거쳐 지난 9월20일 국회 본회의서 통과됐다. 상가임대차법 개정안은 크게 ▲임차인의 계약갱신요구권 행사기간이 기존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 ▲권리금 회수 보호기간이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 ▲상가 권리금 보호대상에 전통시장 포함 ▲상가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신설 등 4가지다.

이 4가지 모두 상가임차인의 안정적인 영업권을 보장하고 이를 강화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정부는 이를 통해 자영업자 등의 노력을 통해 상권이 활성화되고,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다 해도 임대인의 무리한 임대료 인상 등으로 상권 발전에 기여한 임차인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해소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가임대차 개정안은 국회만 통과한 것으로 실제 현장에 적용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태원, 명동 등 임대료가 비싼 기존 상권은 임대차보호법 적용범위에 포함되지 않아 타격이 클 것으로 예측된다.

임대차보호법 적용범위에 있는 임차인들은 임대료 인상률 상한 제한(연간 최대 5%) 등의 보호를 받지만 환산보증금이 9억원 이상인 이태원은 임대차보호법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산보증금이란 보증금에 월세(월세×100)를 더한 금액으로 일정 기준을 초과하면 ‘부유한 임차인’으로 분류돼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1월2일 상가 내몰림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상생협약 표준안’을 마련해 고시한다고 밝혔다. 도시재생구역 내 상가를 상가임대차보호법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빌려준 건물주는 리모델링 비용 등을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받을 수 있고, 정부와 지자체가 직접 상가를 마련해 최대 10년까지 저렴하게 빌려주는 상생협력 상가로 올해부터 조성한다는 내용이다.

상생협약은 도시재생지역에서 임대인, 임차인, 지자체장 등이 자발적으로 체결하는 협약이다. 임대료 안정화, 임대차 기간 조정, 임대 조건 이행 시 우대 조치 등을 포함하고 있다. 국토부가 마련한 표준안은 임차료 인상률과 계약갱신요구권을 상가임대차보호법(5%, 10년)보다 강하게 보호할 예정이다.

국토부는 올해 상반기부터 도시재생지역에 상생협력 상가도 조성할 방침이다. 상생협력 상가는 공공(지자체, 공공기관 등)이 빈집이나 빈 점포 등을 리모델링 또는 용도전환 하거나 유휴 국공유지와 공공기관 보유 토지에 짓는 상가건물로, 청년 스타트업이나 지역 영세상인 등을 상대로 최대 10년 동안 시세에 비해 저렴한 임대료로 제공될 예정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지자체가 그동안 맺어온 상생협약은 권리·의무가 구체적이지 못하고 이행 여부도 자율에 맡겨 실효성에 한계가 있었다”며 “이번 표준안은 구체적인 인센티브 제공으로 실효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실태 파악부터 우선해야 근본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서진형 대한부동산학회장(경인여대 교수)은 “아직 정부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우리나라 상가건물에 몇퍼센트 정도 차지하는지 등의 통계가 없는 듯 하다. 실태파악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결국 상생협약을 통해 상가임차인과 임대인 간 협의체를 만들어 일정 부분 합의하고, 기존 상인들의 상가를 활성화시키고 서로 손해보지 않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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