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디자인 전문대학원 도무스 아카데미의 새로운 사이언티픽 디렉터, 파비오 노벰브레가 한국을 찾았다. 지금, 이탈리아 디자인 정수를 승계하는 유일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를 서울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에서 만났다.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에 서 있는 파비오 노벰브레. 

 

도무스 아카데미는 밀라노에 위치한 유서 깊은 디자인 전문대학원이다. 안드레아 브란치, 알레산드로 멘디니 등 이탈리아 디자인의 거장이라 불리는 이들이 후대에게 전문적인 디자인 교육을 시키고자 1982년 설립했다. 비즈니스 디자인, 패션, 인테리어 디자인, 건축 등 12개의 디자인 석사과정을 운영한다. ‘Learning by doing’이란 신조 아래 워크숍과 인턴십으로만 구성되는 독특한 커리큘럼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도무스 아카데미의 사이언티픽 디렉터(Scientific Director, SD)는 자국의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전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당대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가 앉는 자리. 파비오 노벰브레는 과감하고도 자유로운 이탈리아 디자인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현대의 디자이너로서, 올해 11월부터 도무스 아카데미의 SD이자 브랜드 대사로 임명됐다.

 

방금 한국가구박물관 투어를 마쳤습니다. 어땠나요? 얼마 전 교토에 다녀온 이후라 그럴까요, 동아시아 문화권에 대한 공부를 한 기분이에요. 한국의 추운 날씨와 뚜렷한 사계절이 건축의 스케일과 형식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연환경을 반영한 지혜로운 건축 방식이 인상 깊었어요.

 

지난 11월부터 도무스 아카데미의 SD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감이 궁금한데요. 도무스 아카데미는 이탈리아의 디자인 마에스트로들이 설립한 최고의 디자인 전문 대학원입니다. 유일무이한 세계 최고 교육기관이지만, 그 가치가 퇴색되었던 시기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죠. 1960~70년대 이탈리아 디자인을 상징했던 과감하고, 극단적 이고, 때로는 자극적이기까지 했던 본질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기 위해 저를 SD로 임명했다고 생각해요.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실험적이고 새로운 것들을 발명해내는 연구실 같은 도무스 아카데미로 이끌고 싶어요.

 

SD는 한국에선 조금 생소한 개념인데요. 어떤 역할을 하나요? 어느 국가에도 없는 직함이긴 해요. 도무스 아카데미의 전통적 역할이기도 하고요. 배의 선장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학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매일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진 않지만, 학교의 비전을 제시하고 교내의 모든 구성원에게 교육적, 문화적 동기를 부여합니다.

 

로마에 위치한 남성 셀렉트 숍 슈르트 바이츠(Stuart Weitz)의 내부 공간으로 파비오 노벰브레가 디자인했다.

 

이전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혁신’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당신이 추구하는 디자인의 방향성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인가요? 그런가요? 저는 직접적으로 ‘혁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런 콘셉트로 이해될 수 있었겠네요. 앞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눈이 앞에 달린것 역시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인간은 앞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발전해왔죠. 혁신을 위해 노력하거나, 억지로 하는 활동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저는 삶 자체가 혁신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향하거나, 아예 없어지는 것뿐이죠.

 

파비오의 스튜디오인 ‘카사 노벰브레(Casa Novembre)’와 자택 전경.<br>
파비오의 스튜디오인 ‘카사 노벰브레 (Casa Novembre)’와 자택 전경.

앞으로 향하거나, 아예 없어진다는 말이 재미있네요. 현재 한국의 디자인 트렌드는 뒤를 돌아보며 발전하는 데 의의를 두고 있거든요. 레트로 스타일 같은. 사실은 전세계의 디자인 트렌드가 보이는 현상 중 하나예요. 사람들이 모두 뒤를 돌아보고 있죠. 우리가 사용하는 IT 디바이스가 우리를 빠르게 바꾸고, 우리도 그것을 원하는데 동시에 할머니가 사용하던 의자, 예전에 우리가 가졌던 좋은 것을 원하죠. 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의 현재를 과거로 채우는 것이 당신을 편안하게 만들 수는 있겠죠. 따뜻하고, 보호받는 기분이 드니까요. 하지만 그건 안주입니다. 인간은 진화하도록 만들어졌어요. 옷, 가구, 제품까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을 증명합니다. 각각의 세대는 그들이 사는 시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해요. 여기 있는이 의자가 당신의 할머니가 사둔 것이었다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 어요. 왜냐면 그건 할머니 물건이고, 당신에겐 당신의 의자가 있어야죠! 우리는 ‘나의 시간’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누구였는지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것을 디자인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파비오 노벰브레가 SD로 있는 도무스 아카데미에 그대로 적용될 생각이겠네요. 물론이죠. 편안함에 대한 기억을 동력으로 삼거나, 우리의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 도무스 아카데미를 상상할 수 없어요. 제가 생각하는 도무스 아카데미는 ‘실험실’입니다. 언제나 그런 역할을 해왔고,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실험실이 될 겁니다.

 

디자이너로서의 당신도 궁금해요. 디자인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게 디자인은 일종의 교통수단이에요. 무언가의 형태를 결정할 때, 저는그 안에 담길 콘텐츠를 정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콘텐츠는 언제나 다르죠. 그러니 디자인은 그저 ‘뭘 말하고자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집중해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나요? 제가 전하는 메시지는 보통 아주 간단해요. 사랑과 자유, 우정과 진실 같은 단순한 것들이죠. 기본적이고 단순한 것에 집중하는 게 저예요.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였죠(웃음). 요즘은 ‘사랑’이 제 모든 생각의 중심에 있어요. 사랑은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 같아요. 세상에 그보다 강력한 것은 없죠. 가끔은 저자신이 생애 내내 사랑에 대해 말하는, 이탈리아인 소년일 뿐이란 생각도 하죠.

 

그동안 정말 놀라운 공간들을 디자인했는데요. 공간을 보며 남달리 느끼는 점들이 있나요? 1994년에 홍콩에서 첫 작업을 진행했어요. 그게 어제처럼 생생하네요. 언제 나처럼 오프닝 직전까지 작업을 하고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돌아왔죠. 처음으로 공간 전체를 둘러봤어요. 그때 저 자신에게 말했어요. “파비오, 넌 정말 잘한다. 이건 아름다운 공간이야.” 전 그저 본능적으로 그런 걸 잘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이들 에게 특별한 재능이 한 가지씩 있는 것처럼 제게 그런 게 있는 거죠. 저는 공간이 주는 진동을 느끼고, 공간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공간의 언어를 듣고, 느낄 수 있어요.

 

파비오 노벰브레의 대표작인 카사 밀란(Casa Milan). 이탈리아 축구팀인 AC밀란을 위해 지었다.

 

 

 

 

 

 

 

 

 

 

 

 

당신이 디자인한 공간과 제품들에는 언제나 유려한 곡선들이 있죠. 그런 선을 쓰는 이유가 있나요? 어떤 사람이건 공간에 대한 첫 경험은 어머니의 뱃속이에요. 따뜻하 고, 무언가 담길 수 있는 동굴 같은 공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감각이자 공간 경험이에요. 언제나 그것을 염두에 둡니다. 그래서 에지나 직선이 싫어요. 자연에서 온 게 아니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직선을 의도하고 아름다움을 창조하기도 하는데요. 그건 인간답지 않아요. 고대의 인간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이 첫 번째 주거공간으로 삼은 것은 동굴 이었어요. 그건 어머니의 뱃속에서 느낀 경험과 아주 유사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곳에서 살면서 생존하기 위해 싸우고, 아이를 낳고, 실패하기도 하죠. 그 후엔 무엇을 하죠? 벽에 그림을 그리며 기록을 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죠. 공간에서 스토리텔링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는 곡선이 있는 공간에서 스토리텔링을 펼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건 언제나 그럴 거예요.

 

2017년 밀라노에서 열린 국제 가구 박람회(Salone del mobile) 에서 가구 브랜드 카르텔(Kartell) 과 함께 선보인 니모 체어(Nemo Chair).

 

요즘은 무엇이 제일 재미있나요? 저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즐겁고 재미있어요. 세상엔 2가지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는데요. 한쪽은 아침에 웃으면서 일어나는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심술이 가득해서 일어나는 쪽이죠. 저는 전자예요. 새로운 날이 잖아요. 저는 매일 아침의 에너지를 느끼고, 가장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게 제 원동력이에요. 얼마 전 영화 <위니 더 푸(Winnie The Pooh, 곰돌이 푸)>를 봤어요. 크리스토퍼 로빈이 푸에게 묻죠. “푸, 오늘이 무슨 날이지?” 푸가 대답해요. “오늘은 오늘이지!” 그 대답이 너무 좋았어요. 저도 아침에 일어나면 제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 요. “오늘은 오늘이야. 오늘을 최고의 날로 만들어보자!” 그러면 매일매일이 특별해 져요. 제 인터뷰에 ‘위니 더 푸’를 꼭 적어주세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니까요. 진심이에요.

 

아웃도어 가구 ‘AND’

그럴게요. 당신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굉장히 많잖아 요. 그런데도 매일 아침 완전히 충전된다니 놀랍네요. 그걸 위해 특별히 챙기는 게있다면요? 일과 생활의 단절이요. 제 집과 스튜디오는 완전히 붙어 있어서 그게 굉장히 어려울 수 있죠. 하지만 잊을 줄 알아야 해요. 저는 침대에 누운 순간만큼은 명상 중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잊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우리는 매일 리프레 시되어야 하는 존재예요. 매일 아침 “오늘 내가 뭘 해야 하지?”라고 묻죠. 그게 저를 환기시키는 방법이에요. 일은 스쿼시를 하듯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 아닌, 하나씩 끝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단절이 더 쉬워집니다. 만약 당신이 아주 긴 산책을 해야 한다면, 긴 산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세요. 당장 내가 내디뎌야 할 발걸음 하나에 집중하세요. 오늘 할 것, 지금 할 일에 100% 집중하면 많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질서와 균형을 찾을 수 있어요.

 

지금 이 인터뷰에도 100% 집중하고 있다는 말 같아 반가워요. 네, 완전히 집중하고 있어요. 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게 저에겐 아주 중요해요. 제가 여기에 있으면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수는 없죠. 그게 모든 것을 해결하게 해주는 저만의 비밀이에요.

 

사진=정택 /취재협조= 도무스 아카데미 한국지사, 한국가구박물관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