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 투쟁 참여, 을사늑약 반대 상소 투쟁
"의병 일으켜 매국적 토벌함이 불가함 알지 못하며,
상소를 올려 토적함이 불가하다는 것 또한 알지 못하겠다"

이설 선생 묘소. / 사진=유족, 국가보훈처
이설 선생 묘소. / 사진=유족, 국가보훈처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했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1일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이어 그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 지사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줬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조선 문신을 지냈던 이설(李偰) 선생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홍주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병든 몸으로 1905년 을사늑약 반대 상소 투쟁을 했다. 양반 출신 이설 선생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선비의 기상을 보였다.

국가보훈처와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복암(復菴) 이설 선생은 철종 원년(1850) 1월 결성군 화산면(현 충남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에서 큰 아들로 태어났다.

이설 선생 집안은 홍주 지역의 명문가였다. 이설 선생의 직계 선대에는 문과 출신자가 여러 명이었다. 선대들은 호조판서, 목사, 군수 등 고관을 역임했다.

이설 선생은 17세 때인 1866년 병인양요에 조정에서 방책을 구하자 ‘응상동뢰차(凝上冬雷箚)’를 지었다. 1878년에는 ‘의상척양왜소(擬上斥洋倭疏)’를 올렸다. 관직이 없어 조정에 올려지지는 못했으나 이 상소를 통해 그는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점차 득세하고 척화하는 자들은 화를 입게 되는 상황을 지적했다. 왜는 ‘서양의 앞잡이’라며 왜와의 화친을 주장함은 곧 매국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설 선생은 33세 때인 1882년에 생원시 복시에 합격했다. 1888년 겨울에 알성과 응제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인 1889년 12월 식년시 전시에 합격했다. 1894년 봄 응교에 제수됐으며, 얼마 후 사간에 임명됐으나 일본이 내정개혁을 강요하자 상소를 올려 이를 거부할 것을 주청하면서 사임했다. 그해 6월 21일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고 친일 내각이 조직되는 등 반식민지상태가 되자 이설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895년 8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설 선생은 항일의병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이설 선생은 상소를 올려 을미사변을 ‘역적의 변란’으로 규정했다. 단발령이 내리자 이설 선생은 동지 김복한 등과 함께 홍주성을 중심으로 그해 12월 1일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이설 선생은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장계와 격문을 작성했다. 일의 추세에 대해 염려하는 안병찬에게 “이 일은 천지가 다하고 귀신에게 질정을 하여 만고에 뻗치고 백세를 기다려도 큰 의리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병을 일으킨 지 사흘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했다. 12월 4일 낮 이설 선생은 관찰부로 갔다가 곧 바로 구속됐다. 이어 안병찬, 홍건, 송병직 등 모두 23명이 구금됐다.

1896년 2월 25일 고등재판소에서 재판장 이범진의 공초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설 선생은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힘이 모자라 도적을 치지 못했다”며 “차마 군부(君父)가 당한 욕을 말한다면 의리상 살아 있을 수 없어 춘추필법에 따라 붓으로라도 주륙하려는 뜻을 품고 항의하는 장계를 올리고자 했다. 죽음이 있을 따름이요. 다른 할 말은 없소이다”고 했다.

이설 선생은 곤장 80대를 선고받았지만, 고종의 특사로 2월 28일 풀려났다.

1905년 11월 27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5조약이 맺어졌다. 당시 이설 선생은 식사마저 못할 정도로 중병을 앓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설 선생은 상소 투쟁을 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당시 이설 선생은 “신하된 자 죽음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죽음도 의리가 아니다. 필주설전(筆誅舌戰)이 무익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필과 설밖에 없으니 어찌하리오”라고 했다.

그는 김복한과 서울로 가서 김소사 집에서 기거하면서 상소문을 작성했다. 12월 2일 상소를 올렸다. 이설 선생은 상소를 통해 매국적(敵)을 벨 것, 각도 관찰사에게 명령을 내려 군량을 준비하게하고 백만의 충의군을 모집해 끝까지 무력 항전할 것을 주청했다.

이설 선생은 하지만 그해 12월 4일 김복한과 함께 체포돼 경무청 감옥에 구금됐다.

경무청에 구금된 다음날인 12월 5일 이설은 고문관 와타나베의 공초를 받았으며 같은달 30일에는 경무국장 박승조의 공초를 받았다. 이설 선생은 이 자리에서도 중봉과 청음의 고사를 들어 역신을 토벌할 것을 주장했다. 박승조가 “비록 그러하나 시국은 그러하지 않다. 관중과 제갈량이 다시 나와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돌아가 후학을 계발함만 못하다”고 했다.

이에 이설 선생은 “갑오년의 의리가 금일의 의리요, 금일의 의리가 갑오년의 의리다”며 “의병을 일으켜 매국적을 토벌함이 불가함을 알지 못하며, 상소를 올려 토적함이 불가하다는 것을 또한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설 선생은 2월 1일 석방됐다.

보훈처는 “이설 선생의 상소운동은 와병 중에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형편이 못되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었던 최상의 방편이었고 구국의 결단이었다”며 “그는 귀향한 후 안병찬 등과 협해 민종식을 영수로 한 제2차 홍주의병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설 선생은 병이 악화되자 마지막 상소인 ‘유소(遺疏)’를 작성해 문인인 이병량에게 올리게 했다. 이설 선생은 1906년 5월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보훈처는 “이설 선생은 척왜론과 대일결전론을 실천에 옮긴 관료이자 현실비판적인 유학자였다”며 “동시에 민족적 위기에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항일구국 투쟁에 헌신한 민족운동가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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