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혐오의 시대’, 치열한 ‘편 가르기’ 현상
상대의 소중한 ‘다른’ 생각 존중할 수 있어야

우리는 현재 ‘증오와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 구성원 간 응원과 격려는 적고, 서로 의심하고 헐뜯는 데 더욱 열중하고 있다.

지난해 전 세계적인 바람이 불었던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은 ‘여혐’(여자혐오), ‘남혐’(남자혐오) 등 성(性) 갈등으로 변질돼 당사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고, 이밖에도 제주도 난민 문제,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 사당동 주점 폭행 사건 등 다양한 사건들을 둘러싼 갈등도 극단적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동영상 공유 서비스인 유튜브(Youtube)에서도 이 같은 증오‧혐오 행위 콘텐츠가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우리나라 정치 관련 동영상 콘텐츠의 대부분은 가짜뉴스와 선동 등을 통해 ‘편가르기’에 집중하고 있다.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이와 같은 갈등의 모습은 종종 관측된다. 어느 날은 한 술집에서 특정 정치‧사회적 사안을 두고 격론을 펼치다 주먹다짐을 하는 어르신들을 본 적이 있고, 명절 등 가족 행사에서 가족들 간에 괜한 시비가 있을까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언급을 피한다는 청년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이 우리를 화나게 하고, 상대를 용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경제상황이 좋지 않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 사회의 분위기가 ‘여유’가 없는 삶을 살도록 만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일리가 있는 분석이지만, 조금은 부족해 보인다. 경제는 당시에도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고, ‘무한경쟁’의 시대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열렸기 때문이다.

일련의 갈등 과정들을 추적하다보니 기자는 재밌는 점을 발견했다. 대부분 갈등이 생긴 ‘계기’와 ‘이유’가 다르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갈등은 이미 먼저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커뮤니티나 동영상 콘텐츠 등은 사실관계를 잘 알고 있는 입장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을 접할 때가 많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싫어’라는 전제를 하고 보면 상당한 설득력 있는 콘텐츠로 인식된다.

사회 관념상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싫다’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지만, 이 감정을 투영시킬 대상으로의 계기(사건)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혐‧남혐 등 논란도 이 같은 맥락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를 싫어할 수 있고, 어떤 사건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너무도 명백하게 헌법에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타인에게 표출되고,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또한 우리 사회의 합의사항이다.

프랑스어 ‘톨레랑스’(tolerance)는 관용, 아량, 포용력 등을 의미한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구교와 신교 사이의 대혼란의 시대에 등장한 개념이다. 자신과 다른 신앙, 사상, 행동방식 등을 가진 사람을 용인한다는 의미로 사용됐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의 소중한 ‘다른’ 생각을 존중할 수 있을 때 불필요한 갈등은 줄어들고 사회는 건강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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