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인상 열흘 앞두고도 본사-점주 간 상생안 합의 요원… 본사, 적극적으로 나설 때

하나의 사건이 열 명의 눈에 비치면 열 개의 사건이 된다. 영화 라쇼몽(羅生門)의 큰 맥이다. 영화 속 한 남자가 죽었다. 남자의 죽음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설명이 모두 엇갈린다. 한 인물은 남자를 자신이 죽였다고, 또다른 인물은 남자가 자결했다고 말한다. 영화는 끝내 남자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사실 확인 없이 끝난다. 어쩌면 ‘단 하나의 절대 진실’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우리 각자의 눈은 저마다의 입장으로 세상을 각색해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각층의 시선 역시 이와 비슷하다. ‘2019년도 최저임금은 8350원으로 올해보다 10.9% 올랐다 ’는 사실을 중심으로 고용주, 근로자, 제품 가격에 인건비 인상분을 반영해야 하는 제조사, 이를 바라보는 소비자 등 각자의 입장이 존재한다. 각각의 자리에 서본다면 각자의 논리에 수긍이 간다. 

 

인건비 상승이 수익성 하락으로 곧장 이어지는 고용주 입장에서는 10.9%의 인상이 기막힌 폭등일테고, 8350원 ‘따위’로는 차돌된장찌개 1인분도 살 수 없는 미친 물가를 견뎌야하는 알바생 입장에서는 오른다고 오른 최저임금도 크게 모자라다. 최저임금 인상 등 부대비용 상승으로 제품가격을 올려야한다는 어느 회사의 설명도 타당하다. 200원 오른 우윳값을 태산처럼 바라보는 어떤 부모의 심정에도 이입할 수 있다. 

 

다만 저마다의 입장으로 꾸린 저마다의 세상이 매순간 대량으로 탄생하고 있는 이같은 상황에서도, 모두의 공감이 모이는 자리는 분명 있다. 바로 ‘어려운 자영업자와 가난한 알바생’이 그 한 자리. 어렵다와 가난하다는 표현이 언제나 참인 수사는 아니지만, 대체로 참인 것은 맞다. 자영업자는 단어 그대로 ‘스스로 하는 사업’인 까닭에 번 만큼이 제 삶이다. 최저임금 인상에도 마냥 웃는 자영업자가 드문 이유다. 알바생도 번 그만큼이 삶의 범위다. 알바하는 부자가 없는 것도 같은 논리다. 

 

그렇다면 공감이 모인 저 명제에 집중해야 한다. 가난한 알바생을 위한 내년도 최저임금은 이미 정해졌다. ​남은 건 어려운 자영업자를 구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걸음은 더디다. 당장 열흘 뒤면 알바생의 임금을 올려줘야하는 편의점 점주는 본사와의 상생 협약에 생활을 걸었는데, 협상 진행은 지지부진하다. 애가 탄 점주들은 지난 가을부터 본사와 이야기 하겠다고 아등바등인데 겨울이 짙어지도록 결과물이 없다. 본사가 묵묵부답인 탓이다. 편의점 3사 모두 그렇다. 

 

이는 경쟁적으로 상생을 내세우며, 본사와 점주 간 (아름답고 따뜻하게만 보여지는) 가족적 관계를 일종의 마케팅으로 내세웠던 지난해의 모습과 대조된다. 내년도에는 임금만 오르나. 임대료도 오른다. 2019년을 바라보는 가난한 사장님의 한숨이 더욱 깊어지는 까닭이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