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

 

덕질의 세계에는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 라는 명언이 있다. 다시 말해, 덕질을 쉬는 법은 있어도 덕후라는 위치는 탈각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어떤 대상의 팬이 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옮겨가는 법은 있어도 그 행위 자체를 멈추기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하여 열정을 쏟는 것은 그 주체의 삶에 있어 다양한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팬덤은 참여를 토대로 발생한다. 어떤 대상이나 셀러브리티를 좋아하는 일은 단순히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열정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을 소비하거나 관찰하거나, 혹은 다양하게 지원하는 방식을 통해 참여라는 수행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참여나 연대의식은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특히 미디어가 제공하는 공존의 감각이나, 가상적 감정의 물질화와 같은 다양한 반응은 팬으로 하여금 팬 활동에 좀 더 몰입하게 만드는 기제를 제공한다.

지난 10월에 개봉한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에서는 퀸이 팬들이 떼창을 부를 때 더 열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대에 좀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관객 참여 유도를 위한 도구들을 개발하려 애쓰는 모습이 나온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보헤미안 랩소디의 싱어롱(영화를 보며 관객이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는 영화관)회차가 매진되거나 축제 분위기였다는 리뷰를 종종 볼 수 있다. 야광봉을 들고 있거나 같이 일어나 동시에 같은 노래를 부르는 형태의 참여, 연대의 감정을 제공하는 팬 수행성은 주체들에게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것은 마치 무대에 함께 서고 있다는 감각이기도 하며, 취향을 함께 하고 있다는 커뮤니티 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팬덤은 하나의 취향공동체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활동들은 우리가 생각하던 ‘10대들의 철 없는 시기의 전유물, 혹은 상술에 놀아나 무용한 것에 소비를 조장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세대를 아우르며, 끊임없이 자신과 대상에 거리감에 대해 고민하고 반성하고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들을(셀럽이나 열정을 쏟아붓는 대상을 위해) 실천하려 노력한다. 나눔의 미학을 수행하고, 공동체의식을 갖고 행동하고, 여가를 즐기며 심지어 콘텐츠 생산도 해낸다.

이러한 대상을 잃는 것은 덕후들에게도 굉장히 뼈아픈 일들 중 하나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나 돈을 버는 이유, 누군가와 함께 동일한 대상을 좋아한다는 공존의 감각들이 사라지고 더 이상 그 대상에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 만큼 슬픈일은 없다. 그러니 팬들은 여전히 대상을 찾아 헤맨다. 이것이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명언이 탄생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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