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사에 징벌적 요소 강화만” 지적…‘사후약방문’식 제재만으로는 ‘제2 BMW 사태’ 재발 방지도 힘들어

통상 압박 위협과 실적 부진으로 안팎의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국내 완성차업계에 또 다시 악재가 들이닥쳤다.

정치권이 BMW 화재 사태로 촉발된 여론을 빌미로 자동차·부품 제작사에 대한 징벌적 요소만을 강화하는 방향의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꺼내들었다. 이를 놓고 업계에서는 여론에 떠밀려 급조한 포퓰리즘 입법이 아니냐는 지적이 불거지고 있어 논란이 가열될 전망이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국회 국토교통위원장인 박순자 의원(자유한국당)은 최근 자동차 리콜 방안을 바꾸는 내용을 담은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와 협의를 거쳐 발의된 이 개정안에 따르면, 제작사에게 ‘자동차 결함이 없음을 입증하는 자료 제출 의무’와 자료 미제출 시에는 ‘결함이 있다는 추정’ 규정이 신설됐다.

이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결함의 원인을 파악하고 시정 조치해야 하는 책임이 전적으로 제작사에게 있게 된다. 결함으로부터 소비자의 안전과 재산 등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 당국의 책임을 제작사에게 떠넘긴 셈이다.

물론 제작사에 자료 제출 의무를 부과하고 미제출시 제재를 강화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리콜과 같은 행정 처분의 근거가 되는 조사 및 판단 등의 책임은 국가기관에 있는 게 법치 행정의 기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 당국의 역할은 방기한 채 제작사에 대한 징벌적 요소만 강화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전문가는 “우리나라 자동차 리콜 제도의 구조적 문제로 리콜 요건이 명확하지 않고, 리콜 업무가 사실상 제작사에게 일임돼 있어 객관성이 결여돼 있다​며 ​국가기관의 선제적 대응 시스템은 미흡하고, 실질적으로 문제가 커지고 나서야 사후적으로 개입한다​고 질타했다. 


이어 ​이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처방은 도외시하고, 제작사의 입증 책임 강화,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등 ‘사후약방문’식 대처만으로는 자동차 결함 문제로 인한 소비자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BMW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정부 당국의 관리 감독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전된 논의가 없는 상황인 것도 문제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 그래픽=조현경 디자이너


◇ 결함 입증 책임을 관리감독해야하는 국가기관 아닌 제작사에게 전가

실제 발의된 개정안을 살펴보면 제작사에게만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할 뿐, 정부기관의 역할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전문가들은 국내 유일 사고 분석과 결함 조사 연구 기관인 자동차안전연구원(KATRI)의 사고 조사 권한, 결함 조사 역량 부족으로 선제 대응이 사실상 곤란한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즉, 미국 NHTAS(도로교통안전국)처럼 국내 리콜 담당기관이 강력한 조사 권한 및 능력을 갖추고 자체적인 행정력을 키울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또 제조물책임법 등 민사책임 영역에서 소비자가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힘든 영역의 경우 입증 책임을 완화해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를 행정 처분 영역까지 확대하는 것도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자료 제출을 하지 않을 경우 결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는 규정 역시 문제의 소지가 크다.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유죄로 추정한다’는 식의 논리와 다를 바 없으며, 결함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방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자동차관리법의 입법 취지와도 근본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개정안대로라면 제조사는 결함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리콜을 실시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으며, 결함 원인 불명으로 유효한 시정 조치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로 인한 혼란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 불명확한 리콜 범위…제작사와 국가기관 상호 협의해 초기부터 리콜 검토해야

현행법 상 제작사가 결함 관련 자료 제출에 소극적이거나, 늑장 리콜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리콜 요건의 대상과 범위가 불명확하고, 규제 당국은 피해가 커지고 나서야 개입하는 구조적인 요인이 가장 크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전문가들은 리콜 요건을 보다 명확히 하는 것은 물론 초기 단계부터 규제 당국이 개입해 관리 감독할 수 있도록 제도화를 추진하고, 이를 기반으로 제작사와 국가기관이 상호 협의하여 조기에 리콜 검토가 이뤄지도록 하는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행 자동차관리법에서는 ‘자동차 또는 자동차부품이 자동차안전기준 또는 부품안전기준에 적합하지 아니하거나 안전 운행에 지장을 주는 등의 결함이 있는 경우’라고 다소 모호하게 리콜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안전 운행에 지장을 주는’이라는 모호한 규정이 제작사, 소비자, 관련 부처 간 리콜 사안 여부에 대한 심각한 견해 차이를 야기시키고 있는 셈이다.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제작사가 시행한 리콜과 은폐, 늑장 리콜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명확하지 않아 제작사가 최선을 다해 빠른 시간 내에 리콜을 실시한 경우에도 처리 시점에 대한 논란과 분쟁은 언제나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리콜 요건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사에 지나치게 가혹한 책임과 처벌이 부여된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개정안에는 ‘제작사가 결함을 알면서도 지체 없이 시정하지 아니하여 생명, 신체 및 재산에 중대한 손해를 입은 자가 있는 경우에는 그 자에게 발생한 손해의 5배를 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배상 책임을 진다’라는 규정이 추가됐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제작사의 책임성을 강화하고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도입 자체의 정당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정안대로라면 ‘제작사가 결함 없음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결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결함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작사는 징벌적 배상책임은 물론 대규모 리콜, 형사 책임까지 져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지체 없이’라는 표현 역시 은폐, 늑장 리콜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명확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는 리콜 처리 시점에 대한 논란과 분쟁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되고 실효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리콜 요건 명확화 등이 전제돼야 한다는 게 완성차 업계의 주장이다.

법리상 체계 정당성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도 있다. 민사법 영역의 손해배상책임 조항 자체가 공공의 안전을 다루는 행정법인 자동차관리법에 삽입되는 게 맞지 않다는 것이다. 또 자동차관리법의 개정 방향성은 소비자의 손해 발생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논의돼야 하며, 여론에 휘둘린 징벌적인 사후적 제재 강화가 목적이 아니라는 의견도 나온다.

하명호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개정안 중에는 합리적인 시정 요건은 형성하지 않고 제작사에 대한 제재나 부담만 가중하고 있다”며 “리콜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이 어려운 것은 물론 제작사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등 입법 체계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 수입차는 적용 어려운 반쪽짜리 개정안…국내 완성차·부품사 역차별 우려

현재 논의 중인 개정안은 국내 제작사와 부품사들에게만 규제로 작용될 수 있다는 부작용도 우려되고 있다.

수입차 업체들은 주요 연구시설과 생산시설 등이 해외에 있어 결함 여부 등을 판단하기 위한 담당기관의 수사 및 조사 등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실질적인 손해배상이 쉽지 않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또 리콜은 국내 시장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글로벌 이슈 사항으로 파급 효과가 크다. 국내 리콜 사항이 미국 등 해당 국가의 판매 차량과 동일할 경우에는 해당 국가에 보고하도록 돼 있으며, 이에 따라 제조사 본국에서 리콜을 한 경우 해외 시장에서는 리콜 사안인지 여부가 불분명하더라도 리콜을 강제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특히 국내의 과도한 제재는 불필요한 통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규제 강화가 해외메이커입장에서는 시장 진입 장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해외 메이커는 본국에 통상 이슈를 제기할 수 있으며, 해당 국가에 진출한 국내 업체에 대한 보복적 제재가 가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 시 미국은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국내 안전, 환경 기준의 완화를 요구해 관철시킨 바 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실효성 높은 리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소비자뿐만 아니라 제작사 모두에게 바람직하다”면서도 “현재 논의 중인 대로 제작사에게만 징벌적 요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안이 도입되면 현 리콜 제도의 구조적 개선은 불가능하며, 최근 위기 상황에 처한 국내 자동차업계에게만 피해가 돌아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미∙중 무역분쟁과 국내경기 침체로 가뜩이나 어려운 자동차산업에 황당한 이중 규제로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며 “실제 결함 원인 규명보다는 자동차기업에 대한 처벌만 강화된 현재 추진 안은 소송 남발 등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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