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 놓고 중재 역할 이어갈 듯…전문가들 “물밑 접촉 통해 해결해야”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오전(현지시간) 싱가포르 썬텍(SUNTEC)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20차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해 환영의 말을 듣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3일부터 18일까지 5박6일 일정으로 싱가포르와 파푸아뉴기니를 잇따라 방문해 제20차 한·​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참석해 ​ 안보·​경제 외교에 나선다.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로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문 대통령은 이번 외교 일정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 과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미·​중·​러 등 한반도 주변국 정상 또는 준정상들을 만나 중재 역할을 통해 협조를 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문 대통령의 순방 핵심은 ‘한반도 평화’와 ‘신남방정책’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 유럽 순방에서 유럽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 영국 정상을 만나 대북제재 완화를 요청했다면, 이번 순방에서는 비교적 북한에 우호적인 러시아와 중국을 만나 중재 역할에 나설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러시아와 중국을 향해 북한 비핵화를 촉진하기 위한 대북제재 완화 문제 등을 거론할 것으로 예측된다.

문 대통령이 외교 일정에 주목하는 데는 북한 비핵화 등 외교 현안을 풀어갈 주요 국가 인사들과의 정상회담이 이번 순방에 대거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이번 순방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등과 만나는 일정을 조율 중이다.

문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북핵 정상외교에 돌입한다. 문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북·​미 비핵화 협상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면서 남·​북·​러 3각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한 신북방정책발전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간 정상회담은 이번이 네 번째로 지난 6월 이후 5개월 만이다. 이번 한·​러 정상회담에서는 최근 북미 고위급회담이 연기되는 등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북미 협상이 소강국면에 빠졌다는 우려가 나오는 만큼, 협상을 다시 가속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13일부터 18일까지 5박6일 일정으로 싱가포르와 파푸아뉴기니를 잇따라 방문해 안보·​경제 외교에 나선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 ASEAN·APEC 정상회의 일정 표. / 그래픽=조현경 디자이너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그동안 비핵화 협상에서 대북제재 완화의 필요성을 언급해온 만큼 이날 회담에서도 제재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는 관측을 제기했다. 그러나 지난 문 대통령 유럽 순방 당시 유럽 정상들의 대북제재 완화에 대한 반응이 우리 정부와 다소 달랐던 만큼, 공개적으로 대북제재 완화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문 대통령은 9월 말 유럽 순방에서 프랑스 등 국가와 회담을 하면서 대북제재 완화 협조를 요청했으나, 유럽 국가들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강조하는 등 원론적인 언급을 강조한 바 있다. 또 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던 유럽 국가들은 CVID를 먼저 하지 않으면 대북제재 완화는 없다는 강경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비핵화 문제 등에 대한 중재 역할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중재 역할을 한다고 해서 북미 간 비핵화 등 이행속도가 빨라질 것 같진 않다”며 “문 대통령은 미·​중·​러 정상급과 만나 기존 방식 그대로 비핵화 촉진을 위한 도움을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평론가는 이어 “북미 간 최종 담판을 해야 하는 국면인 만큼, 문 대통령이 중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한계가 있다”며 “주변국 정상들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원칙론적 이야기 외에 없다. 새로운 중재안을 들고 가서 지지해달라고 할 상황도 아니다. 이번 회담에서도 통상적인 원칙론 정도만 확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문 대통령의 중재 역할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이 미국과 무역 갈등을 빚고 있고, 미·​중·​러 3개국 외에 우리 정부 중재 역할에 힘을 실어줄 국가도 특별히 없다는 이유에서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문 대통령의 중재는 어려울 것 같다.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 평화 등에 대한 대화 및 협상을 통한 해결을 지지한다면서도 유엔 안보리 결의들을 엄격하게 이행하겠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우리 정부가 새로운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가)겉돌기만 할 것”이라며 “러시아도 비핵화보다는 오히려 철도·​도로 연결 쪽에 관심이 많다. 결국 이번 순방 성과도 지난 유럽 순방과 비슷한 정도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문 대통령이 주변국 정상 또는 준정상과 중재 역할로 비핵화 진전 등을 논의하기 보다는 미국, 북한과 만나 (어느 쪽도 불편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해야 한다”며 “문 대통령은 기존 비핵화 입장 등의 기조를 이어가면서 물밑 접촉을 통해 북미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특히 북한을 대상으로 비핵화 신고검증, 단계적 조치 등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데 이러한 내용을 (이번 회담에서) 공개적으로 할 건 아니라고 본다. 공개적으로 하게 되면 북·미 양국에게 압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어 오히려 협상에 도움 되지 않을 것”이라며 “한·미 워킹그룹 또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물밑 접촉하며 이 협상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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