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력 큰 삼성생명 선택으로 업권 신뢰 깨질 수 있어

“모든 중개 관계에는 신뢰가 필요하다. 우리는 환자의 위험 부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의사의 충고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중고차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 신뢰가 없고, 제품과 서류가 복잡할 때 시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신뢰가 과거 경험을 통해 형성될 때 고객은 그 관계를 가장 가치 있게 여긴다. 투명성은 오늘날 금융계에서 주문처럼 외는 말이다.”

옥스퍼드대 존 케이 교수의 책 ‘금융의 딴짓’에 나온 대목이다. 이 책은 금융의 복잡성, 신뢰의 파괴, 금융의 탐욕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특히 위 대목에서 그는 금융권의 신뢰를 투명성과 연결지었다. 신뢰가 있다는 말은 투명성과 청렴함, 반부패와 직결된다. 반대로 신뢰가 없다는 말은 투명하지도, 청렴하지도 않고 부패했다는 뜻이다. 고객이 신뢰하지 않는 기업이 망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또 보험업권 신뢰가 무너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는 이때, 이 말을 보험사들이 쉽게 넘겨선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뢰는 금융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주문처럼 외는 것이다.

생명보험업계의 즉시연금 미지급금 사태의 핵심은 신뢰에 있다. 자살보험금 때도 같았다. 보험사가 주기로 한 보험금을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고객에게 주지 않았을 때 고객은 신뢰의 파괴를 경험한다. ‘자살은 재해가 아니다’, ‘약관이 잘못됐다’, ‘소멸시효가 완성됐다’ 등 말이 많았다. 이런 말을 하는 생보사의 논리를 보면 각 말들은 틀린 게 없었다. 문제는 신뢰의 문제라는 큰 그림을 봤을 때 이는 모두 신뢰를 파괴할 수 있는 도구가 됐다. 자살이 재해가 아니고, 그렇게 쓴 약관도 잘못됐고, 소멸시효가 다 끝났다고 해도, 약관에 주기로 되어 있었다면 그렇게 주는 것이 시장의 원리다. 시장은 계약서를 믿었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어떤 논리도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계약의 논리에 대항할 수 없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지난달 26일 이상묵 삼성생명 부사장을 증인으로 불러 삼성생명 즉시연금 미지급금 문제를 언급했다. 금감원은 삼성생명이 즉시연금 만기환급금을 마련하기 위해 매달 일정 금액을 떼어 적립해놓은 사실을 보험 고객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미지급된 금액을 고객에게 돌리는 것이 옳다고 했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즉시연금 약관 내 산출방법서 등에 관련 내용을 충분히 기재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약관 내 산출방법서’가 있다는 것 자체가 고객을 기만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전문적이고 복잡한 산출방법서를 고객이 알아볼 수 없다면 충분히 설명이 되었어야 한다는 것이 보험의 중요한 원칙이다. 설명의무는 보험사가 주문처럼 외어야 하는 단어다. 그 의무는 고객에게 있지 않다. 보험사에 있다. 단순히 ‘약관에 쓰여 있다’는 말은 보험의 원리를 모르고 한 말이다.

또 과연 보험사가 “약관에 쓰여 있는 산출방법서를 고객이 충분히 이해할 정도로 설명을 했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결국 설명의무 위반이 된다. 금감원의 주장대로 불완전판매를 한 것이 된다. 이런 불완전판매를 하고서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고, 신뢰를 깨뜨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이 부사장은 국감장에서 “보험사가 신뢰를 잃어서 뭐라 해도 잘 믿어주지 않은 게 저희의 업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뢰를 잃은 것의 일차적 책임은 보험사에 있다.

지금에 와서 보험사가 만기환급금을 마련하기 위해 매달 일정 금액을 떼는 것은 보험의 기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약관을 승인한 것은 금감원이라는 말도 모두 신뢰를 깨뜨리는 말이다. 보험의 기본이었다면 이를 설명했어야 했고, 약관이 잘못됐어도 그렇게 쓴 본인은 보험사이기 때문이다. 약관의 해석이 불분명할 때 작성자에게 불리하게 해석한다는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은 우리 법이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정해놓은 원칙이다. 즉시연금을 말할 때 여기서 말하는 ‘작성자’란 금감원이 아니라 보험사다.

자살보험금 때처럼 삼성생명의 즉시연금 미지급금액은 다른 생명보험사보다 훨씬 크다. 영업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삼성생명의 즉시연금과 관련한 결정이 생보업계에 끼치는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작은 보험사가 즉시보험 미지급금에 대해 지급 불허를 결정하는 것과 삼성생명이 결정하는 것은 분명 그 영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삼성생명이 지금처럼 즉시연금 미지급금을 지급하지 않고 고객과 소송으로 간다는 것은 업권 전체의 신뢰 회복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회사의 책임자들은 자기 돈이 아닌 ‘타인의 돈’을 관리하는 자들이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염려하고 경계하는 것처럼 (타인의 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그들에게 거의 기대할 수 없다. 그런 회사 관리에는 거의 항상 태만과 낭비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의 대부 애덤 스미스의 저주다. 지금은 삼성생명이 이 말을 심각하게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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