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심 준유사강간치사 무죄·심신미약 인정, 징역 5년→4년…정신감정 주장에도 전문가 “새 증거 없이 재수사 어려워”

그래픽=조현경 디자이너

최근 유사성행위로 여성을 숨지게 한 남성을 다시 처벌해 달라는 국민청원이 18만여명(11월1일 기준)의 동의를 얻고 있다. 피해자의 장기까지 손상시킨 행위가 가해자의 성도착증이나 성적 콤플렉스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또 준강제추행치사 혐의를 무죄로 보고 가해자에게 상해치사 혐의를 적용해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라는 이유로 징역 4년으로 감형한 2심 및 대법원 판결을 다시 살펴봐 달라는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시사저널e는 해당 사건의 판결문을 입수해 당시 법원 판단 배경을 분석했다. 정부 답변 기준인 국민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더라도 새 증거 없이 재수사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문가 의견도 있었다.

◇ 1심 징역 5년…준유사강간치사 ‘무죄’, 상해치사 ‘유죄’


이 사건은 38세 여성 A씨가 직장 동료인 동년배 남성 B씨와 유사성관계 후 사망한 사건이다.

검찰의 공소사실에 따르면 두 사람은 2011년 2월 4일 오후 9시쯤 경남 고성군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B씨는 같은 날 밤 11시 40분쯤 술에 취한 A씨를 부축해 식당을 나섰고, 두 사람은 다음날 새벽 0시 40분쯤 B씨가 거주하던 공동숙소에 들어갔다. B씨는 직장동료를 밖으로 내보낸 뒤 A씨를 상대로 유사성행위를 했다.

B씨는 A씨의 허벅지를 이빨로 물어뜯었고, 내부 장기를 만지기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항문에 연결된 일부 직장은 뜯겨졌다. A씨는 새벽 4시30분 쯤 인근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지만 피를 많이 흘려 숨졌다.

B씨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배경은 ‘준유사강간치사’ 아닌 ‘상해치사’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검찰은 ‘피해자가 술에 취해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고 보고 B씨에게 준유사강간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하지만 1심은 이 사건 범행 전후의 B씨의 언동 등에 비춰보면 B씨가 A씨의 의사에 반해 A씨를 추행하려는 의사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 준강제추행치사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1심은 당시 주변인들의 증언에 주목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1심은 ▲피해자 A씨가 식당 앞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 뒤에도 스스로 일어나 큰 도로로 걸어갔다는 주변인 진술 ▲A씨가 스스로 모텔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는 진술 ▲두 사람이 짤막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는 진술 등을 근거로 “A씨가 항거불능 상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상해치사 혐의는 유죄가 선고된다. 남녀 사이에 통상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성행위의 정도를 훨씬 넘어 유사성행위가 이뤄졌고, B씨는 A씨에게 다량의 출혈이 생기는 상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충분히 인식할 수 있어 상해의 고의가 인정된다는 판단이다. 1심은 “피고인은 자신의 행위로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1심은 B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이유에 대해서도 “술에 취해 과도한 성행위 도중 우발적으로 범행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이는 점,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초범인 점, 피고인이 피해자 유족을 위해 2억원을 공탁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2, 징역 54년 심신미약 감형우발적인 범행


B씨는 2심에서 징역 4년으로 감형됐다. 1심과 달리 심신미약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다.

2심은 B씨의 엽기적인 행위를 오히려 심신미약의 증거로 봤다. 2심은 B씨의 유사성행위 행위에 대해 “온전한 판단능력이 있는 상태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B씨가 평소 주량인 소주 1병보다 많은 소주 3병을 마셔 만취한 점, B씨가 A씨의 얼굴을 때리며 “와 이라노, 와 이라노”라고 깨웠다는 모텔 주인의 진술도 심신장애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배경이 됐다.

2심은 특히 B씨가 ‘식당을 나서면서 A씨를 부축해 같이 넘어진 것만 기억날 뿐 숙소로 간 경위가 기억나지 않는다, 방 안에서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진술한 점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의 심신장애 주장은 심신미약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 있다”며 “심신미약 상태에서 과도한 성행위 도중 우발적으로 범행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감형했다. 

 

/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청원인은 해당 사건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만한 심각한 사건이지만 공론화 되지 않았고 유야무야 넘어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해자의 진술만으로 준유사강간치사 혐의가 무죄가 되고 심신미약이 인정됐다는 지적이다.

또 관련 학술보고를 바탕으로 정신감정 등도 주장하고 있다. 청원인은 ‘질과 항문 내 손 삽입에 의한 치명적 사망 사례 보고’라는 제목의 학술보고서도 첨부했다. 보고서는 “과도한 유사성행위로 인해 사망까지 초래한 극히 이례적인 사례”라며 “가해자에게 성도착증이나 성적 콤플렉스 등과 관련한 정신의학적 평가가 이뤄진다면 이 사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한다.

◇새 증거 없이 재수사 어려워…일사부재리·불이익변경금지 원칙 위배

전성규 한국심리과학센터 이사는 “이 사건 청원동의가 청와대 답변 기준인 20만명을 돌파하더라도 재수사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 드러난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청원인의 주장이 일사부재리 원칙,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설명이다.

일사부재리 원칙이란 특정 사건에 대해 판결이 확정되면 그 사건을 다시 소송으로 심리·재판하지 않는다는 법의 일반원칙이다. 불이익변경금지의 원칙은 피고인이 상소한 사건이나 피고인을 위하여 상소한 사건에 대하여는 원심판결의 형보다 중한 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원칙을 뜻한다. 이 원칙은 피고인이 중형변경의 위험 때문에 상소를 단념하는 것을 방지해 피고인의 상소권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전 이사는 “준유사강간치사가 유죄로 인정된 유사 사례를 살펴보면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고, 피고인이 이를 이용해 간음 또는 추행한 사실이 증거를 통해 입증된 사건들”이라면서 “새로운 증거 없이 막연한 심증이나 정황만으로 해당 사건을 재수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대한법학교수회 백원기 회장(국립인천대 교수) 역시 “상고심까지 확정된 사건이고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거나 원심의 증거가 위변조 됐다는 근거가 없는 한 재수사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백 회장은 다만 “근본적으로 주취자는 형을 감경아니라 가중해야 한다. 이른바 주취감경이라는 말 자체가 지금 시대에 맞지 않다”면서 “주취상태를 심신미약 상태로 보아 형을 감경하는 잘못된 양형의 관습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고 피력했다.

 

/ 그래픽=연합뉴스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논란…주취감경 폐지 될까

우리 법(형법 제10조)은 심신장애 또는 심신미약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벌하지 않거나 감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보통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처벌 수위를 낮출 때 이 조항이 적용된다. 2008년 8살 여학생을 성폭행한 조두순이 음주 상태였다는 이유로 징역 15년에서 12년으로 감형받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술을 마셨다고 처벌을 줄여주는 이른바 ‘주취감경’은 국민 다수의 법 감정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한 시장조사 전문 기업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해 2016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81.4%가 음주 후 범죄는 감형이 아니라 가중처벌돼야 한다고 응답했다. 처벌 수위를 낮춰야 한다는 주장은 4.1%에 불과했다.

 

최근 부산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뇌사 상태에 빠진 윤창호씨(22)의 친구가 ‘음주운전을 강하게 처벌해달라’고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20만명 이상이 동의하기도 했다.

지지부진한 음주범죄 처벌 규정 개선은 최근 속도를 내고 있다. 대법원이 음주 상태에서 저지른 운전사고·폭행·성범죄 등을 가중 처벌할지 또는 감경 처벌할지를 두고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소속 양형연구회는 오는 19일 대법원에서 ‘음주로 인한 감경 또는 가중의 여러 문제’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다.

국회도 심신미약 감형폐지에 관한 형법 개정안을 잇달아 발의하고 있다. 

 

서영교 더불어 민주당 의원은 지난 2016년 7월 음주나 약물에 의한 심신장애의 경우 형을 감량해선 안 된다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또 이태규 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해 1월 내놓은 개정안에는 심신미약자에 대한 ‘필요적 감경규정’을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달리 판단하는 ‘임의적 감경규정’으로 바꾸자는 내용이 담겼다. 홍철호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7월 음주를 감형 대상에서 제외하고 최대 2배까지 가중처벌하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