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만에 대법 확정 판결, 배상은 ‘묘연’…日, 주일대사 초치 등 강경 대응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30일 오후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며 취재진을 향해 두 손을 들어 고맙다고 말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1940년대 일본의 강제징용으로 노역한 피해자 4명은 일본 기업에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됐다. 일본 측은 이날 판결에 반발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 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30일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수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2차 대전 이전 구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날 대법원 전합은 2012년 대법원 소부 판단을 그대로 인정했다. 당시 대법원 1부(김능환·이인복·안대희·박병대 대법관)는 원고 패소 판결한 1·2심을 뒤집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고, 구일본제철의 후신인 신일본제철이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 쟁점은 ▲원고 패소 판결한 일본 법원의 확정판결의 효력이 국내에도 미치는지 ▲신일본제철과 구일본제철의 법적 동일성이 인정되는지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는지 ▲민법상 소멸시효가 완성됐는지 등이었다.

이에 대법원 1부는 일본의 확정판결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강제동원 자체가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와 정면충돌해 국내에서 효력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됐다고 볼 수 없으며 구일본제철과 신일본제철의 법적 동일성이 인정된다고 봤다.

대법원 1부 판단에 따라 파기환송 후 항소심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각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래픽=김태길 디자이너


◇94세 강제징용 피해자 눈물…“나 혼자 남아 마음이 아파”

이번 선고는 지난 2013년 8월 대법원에 사건이 다시 접수된 지 5년 2개월 만에 이뤄졌다. 2005년 2월 처음 소송이 제기된 지 13년 8개월 만이다. 소송이 지연되면서 소송 당사자 4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났고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94)옹만 이날 소송에 참석했다.

이춘식씨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오늘 재판에) 나 혼자 나와서 마음이 슬프고 눈물이 많이 납니다”라고 답했다. 이씨는 “그 사람들하고 같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기쁠 것인데 나 혼자 (있어) 눈물이 나고 울음이 나오네”라고 울먹이기도 했다. 이춘식씨는 다른 원고들이 숨졌다는 사실을 이날 알게 됐다. 여씨는 2014년, 김규수씨와 신천수씨는 올해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춘식씨와 함께 자리에 나온 고 김규수씨의 아내는 “판결 선고가 일찍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본인(김규수씨)이 그렇게 한이 되고 멍울 진 것인데”라고 말했다. 또 “조금만 일찍 이런 판결이 났으면 가시기 전에 이런 좋은 소식을 맞았을 텐데 마음이 아픕니다. 진작에 해결되었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강제징용 소송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의도적으로 지연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가 한일 관계 등을 이유로 강제징용 소송을 지연하거나 결론을 뒤집는 안을 제시하는 등 법원행정처와 재판 진행상황 및 처리방향을 논의한 것으로 파악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고(故) 김규수 씨의 부인 최정호씨가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배상은 ‘묘연’, 日 정부·기업 반발…피해자 측 “사과가 우선”

대한민국 법원이 신일본제철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피해자들이 실제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불명확하다. 일본 기업인 신일본제철의 국내 재산이 있다면 강제집행을 통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지만, 국내 재산이 없다면 우리 정부가 강제로 집행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일본 측은 이날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일본 외무성은 대법원 판결 직후 담화를 통해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쌓아온 한일 우호협력관계의 법적기반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것”이라며 “대단히 유감이며 (판결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외무성은 또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방안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시야에 두고 대응하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외무성은 이와 관련 이날 오후 이수훈 주일 한국 대사를 초치(招致)했다.

패소한 신일철주금 측도 입장 자료를 내고 “매우 유감”이라며 “이번 판결은 한일 양국 및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는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1965년 한일청구권·경제협력협정, 그리고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와도 반한다”고 주장했다. 신일철주금은 또 “판결 내용을 정밀히 조사하고 일본 정부의 대응 상황 등에 입각해 적절히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 측은 손해배상 보다 일본과 신일본제철의 사과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피해자 측을 대리한 김세은 변호사는 “이미 오랜 세월을 살아온 피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과를 받고 싶어한다”라며 “먼저 사과를 받고 정당한 보상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사진제공=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원고들, 기술 배우러 취직했으나 ‘무임금 노역’

일본 정부의 강제징용은 노동력 보강이라는 명목아래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군수물자 생산에 노동력이 부족을 호소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타개하고자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공포하고 우리나라 각 지역의 관알선을 통해 인력을 모집했다. 1944년부터는 국민징용령에 따라 우리나라 국민에 대한 징용도 실시됐다.

일본은 1941년 철강생산자들을 총괄 지도하는 정부 직속기구 철강통제회도 설립했다. 구일본제철 사장은 철강통제회의 회장을 역임하는 등 철강통제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구일본제철은 1943년 평양에서 오사카제철소의 공원모집 광고를 냈다. 광고에는 ‘오사카제철소에서 2년간 훈련을 받으면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훈련 종료 후 한반도의 제철소에서 기술자로 취직할 수 있다’고 기재돼 있다.

이 사건 원고인 여운택씨와 신천수씨는 1943년 이 광고를 보고 오사카제철소로 가서 노역을 시작했다. 1일 8시간 3교대제였다. 한달에 1~2회 외출만이 허용됐다.

하지만 노역은 기술습득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두 사람은 화로에 석탄을 깨뜨려서 뒤섞거나 철 파이프 속으로 들어가 석탄찌꺼기를 제거하는 등 화상의 위험이 큰 노역을 했다. 신천수씨는 ‘도망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발각돼 기숙사 사감에게 구타를 당하고 체벌을 받기도 했다.

임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구일본제철은 2~3엔 정도의 용돈을 지급했다. ‘임금전액을 지급하면 낭비할 우려가 있다’라는 이유였다. 여운택, 신천수씨의 동의가 없었지만 구일본제철은 이들의 명의 구좌에 임금 대부분을 일방적으로 입금했다. 저금통장과 도장은 기숙사의 사감이 보관했다. 일본은 1944년 2월 이후 훈련공들을 강제로 징용하기 시작했다. 여운택, 신천수씨는 이 징용 이후에는 용돈도 전혀 지급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45년 3월 미국군의 공습으로 오사카제철소 공장이 파괴됐다. 여운택, 신천수씨 등 훈련공들은 1945년 6월 우리나라 청진에 건설 중인 제철소로 배치됐다. 두 사람은 기숙사 사감에게 임금이 입금돼 있던 저금통장과 도장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사감은 이를 거부했다. 여운택, 신천수씨는 청진에서도 하루 약 12시간 가량 토목공사에 투입됐지만 임금을 전혀 받지 못했다.

또 다른 원고인 이춘식씨는 1941년 대전시장의 추천으로 구일본제철의 가마이시제철소에서 노역에 종사했다. ‘임금을 저금해준다’는 말은 들었지만 임금을 전혀 받지 못했다. 김규수씨는 1943년 1월 군산시의 지시를 받고 모집돼 구 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에서 노역에 종사했다. 임금을 전혀 받지 못했고, 도주하다 발각돼 약 5일간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1945년 8월~12월 각 제철소가 공습으로 파괴되고 일본의 패전으로 구일본제철이 더 이상 강제노동을 시킬 수 없게 되자 각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구일본제철은 1947년 3월 오사카공탁소에 여운택씨를 피공탁자로 해 급료 50.52엔, 예저금 445엔 등 총 495.52엔을 공탁했다. 또 신천수씨 앞으로 총 467.44엔, 이춘식씨 앞으로 23.80엔, 김규수씨에게 급료와 퇴직수당을 합한 50.20엔을 공탁했다.

이후 구일본제철은 1950년 해산했고, 구일본제철의 자산 출자로 야하타제철 및 후지제철, 일철기선, 하리마내화연와 등 4개사가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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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국교정상화와 한일청구권 협정…일본→한국 법원으로 간 소송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1951년 말부터 국교정상화 및 전후 보상문제를 논의했다. 1965년 6월 ‘국교정상화를 위한 대한민국과 일본국가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의 하나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청구권협정)이 체결됐다.

청구권협정 제1조는 ‘일본국이 대한민국에 10년간에 걸쳐 3억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기로 한다’고 규정돼있다.

또 제2조에는 ‘두 체약국은, 두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한다)의 재산, 권리 및 이익, 또 두 체약국 및 그 국민 사이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 센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돼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강제징용 및 위안부 문제를 포함, 양국 간 모든 현안이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에선 강제징용 및 위안부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맞서왔다.

한편 야하타제철은 1970년 일본제철로 상호를 변경하고 1970년 후지체철을 합병했다.

여운택·신천수씨는 1997년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미지급된 임금과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지만 기각됐다. 이 판결은 2003년 10월 원고 패소로 확정됐다.

이후 원고들은 2005년 국내 법원에 같은 취지로 소송을 냈다. 이들은 ‘구일본제철의 여러 공장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강제노동에 혹사당했다. 임금마저 강제로 저축 당했고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며 각 1억원의 위자료를 요구했다.

1·2심은 일본 확정판결의 효력을 인정하면서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그러나 2012년 대법원은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할 수 없고 신일본제철과 구일본제철이 법적 동일성이 인정된다며 신일본제철이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이후 파기환송 후 2심은 대법원 판단대로 신일본제철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각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날 대법원도 파기환송 후 2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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